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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밤 뜨거웠던 요리열전 세종기지표 ‘냉장고를 부탁해’
<8> 여름에 떠올리는 겨울
눈폭풍 잦아 겨울 대부분 실내생활
음식·노래경연하며 지친 마음 달래
동지날은 밤이 하루 20시간 지속
대원끼리 축전 교환하고 팥죽 먹기도
2015년 08월 26일(수) 00:00
여름철 공기는 무겁다. 작은 물방울이 가득 들어차 있다. 숨 쉬는 것으로도 배가 부르다. 허공에 권투하듯 주먹을 내지르면 물풍선이 터지며 와라락 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자외선은 사정없이 내려꽂힌다. 그리고 튀어오른다.

여름에는 감각의 세계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다. 초록 잎은 더 진해진다. 그 무성하고 울창한 기세에 압도된다. 아랑곳하지 않고 빽빽해지는 초록색은 나의 흐물거림, 무력한 살색과 대비된다.

여름은 추위처럼 엄연하다. 너무 더워 생각이 멈출 것 같을 때 차가운 것을 떠올리며 대응한다. 에어컨이나 선풍기, 빙과류 전단지에는 보통 눈 결정 그림이나, 이글루, 펭귄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남극은 한국과 계절이 정반대다. 우리가 낮이 가장 긴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남극의 사람들은 밤이 가장 긴 하루를 보냈다. 북반구가 하지(夏至)일 때 남극은 동지(冬至)이다. 동지는 남극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1년 중 최대의 축제이다. 월동의 절반 지점인 동지를 기준으로 해가 점점 길어지고, 집에 돌아갈 날도 가까워 오기 때문이다.

남극 동지의 전통이 있다. 기지마다 개성이 담긴 동지축하카드를 만들어 남극에서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나라 기지에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이메일을 통해 이른바 ‘동지축전’을 주고받는다. 또한 동지를 기념하여 근사한 옷을 입고 특별한 저녁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세종기지에서는 팥죽을 만들어 먹었다.

세종기지의 동지날은 밤이 20시간 정도 계속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 잠깐 해가 나왔다가 이내 사라진다. 세종기지는 남위 62°에 위치해 있어 남위 74°에 위치한 장보고기지에 비해서는 그래도 해를 볼 수 있는 편이다. 겨울 동안 장보고기지에는 하루내내 해가 뜨지 않는 극야(極夜)가 계속된다.

조명을 켜 두지만 눈폭풍 블리자드가 불면 시야가 온통 제한되어 한치 앞도 보기 어렵다. 블리자드는 초속 18m 이상의, 눈을 동반한 강풍이 부는 현상을 말한다. 블리자드가 시작되면 대원들이 머무는 생활관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린다. 문이 갑자기 밖으로 열리고 컵이 떨어지기도 한다.

블리자드가 잦은 겨울 동안 자연히 실내 활동이 많아진다. 기상시간도 늦추어진다. 남극에 머무는 사람들은 긴 겨울을 재밌고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킹 조지 섬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기지를 방문해서 남극 올림픽, 친선경기 등 체육활동을 하고, 아사도파티 등을 하며 겨울을 보내고 있다.

그 중 음식에 관한 활동은 깊이와 폭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 무료하고 단순한 일상이 반복되면서 허기조차 지겨워질 즈음, 새로운 맛에 대한 탐사라는 것이 신체의 낯선 감각을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기지 28차 월동대원들은 ‘마스터쉐프 인 세종기지’ , ‘냉장고를 부탁해’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정된 식재료를 가지고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냈다. 황치호 조리대원의 말에 의하면 맛 뿐 아니라 요리 주제, 메뉴, 분위기, 조리위생, 팀워크 등이 심사 기준이었다.

팀은 총 4개였다. 입에 착착 감기는 다양한 음식과 전국노래자랑 영상을 준비하여 푸근하고 구수한 맛과 분위기를 연출한 ‘전주 박기사 식당’ 팀, 전채, 본식, 후식 등 코스요리와 함께 홍콩영화 전성시대의 추억을 떠올리는 영상을 준비한 ‘홍콩영화반점’ 팀, 와인에 숙성시킨 돼지고기로 만든 수제 안심 돈까스와 촛불, 샹송을 준비한 프랑스 레스토랑 ‘쇼비뇽 돈까스’ 팀, 프랑스에서 공수한 향신료를 첨가한 빠에야, 즉석요리, 플라멩코 영상 등을 준비한 스페인 레스토랑 ‘꼬미다 데 아모르’ 팀.

원래 대원요리 경연은 매일 수고하는 조리대원을 위해 대장님과 대원들이 주말에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 경연은 단순히 먹방 프로그램 모방이나 전시행정용 쇼가 아니라 긴 겨울을 보내며 자신도 모르게 지쳐가는 서로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활동으로 발전했다.

주위가 온통 무채색인 남극에서 천연의 초록색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농작물 수경재배 시설인 세종온실이 그곳이다. 세종온실에는 현재 맵지 않은 고추나무 일곱 그루, 4년 된 매운 고추나무 한 그루, 청치마 상추, 적상추, 청갓, 치커리, 쑥갓, 깻잎, 애호박, 방울토마토가 자라고 있다. 이 작물들은 실제 평소 식재료로 쓰이며 삼겹살 파티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세종온실의 기본적인 유지, 관리는 류준한 기계설비대원이 맡고 있다. 다른 대원들은 씨앗 파종, 모종이식, 수확 등을 돕는다.

올해 더위가 진했다. 어느새 삼복(三伏)이 지나고 입추(立秋)도 지났다. 여름만큼 선명하지 않더라도 가을도 나름대로의 엄연함을 갖고 있다. 남극은 봄으로 향한다. 봄에는 봄의 엄연함이 조금씩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대원들은 귀로출장 준비로 설레기 시작한다.



〈전 남극 세종과학기지 28차 월동대 생물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