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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지은(再造之恩)과 한반도 정세
이 병 우
단국대학교 교수
2015년 04월 08일(수) 00:00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7월4일 서울대 강연을 했다. 중국 국가 주석으로서는 최초의 대중 연설이었다. 여기서 시주석은 한중의 오랜 역사적 관련성을 거론하면서 서로 도와 난관을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압권은 42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운 이야기다.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다”는 말도 했다.

불과 70년 전 한국전쟁 때 참전한 애기는 쏙 빼버리고 400여 년 전 일을 어제 일어난 것처럼 애기하다니 심모원려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중국 지도부의 흉중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운 일이 400여년이 지나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연설이다. 시 주석의 대일 공조론 바탕에는 동양전통의 의리론에 입각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논리가 깔려 있다.

재조지은이 무엇인가. “명이 망해가는 조선을 다시 세워주었다”는 철석같은 믿음 아닌가. 임란 이후 조선과 명나라 관계를 규정한 상징적 단어이자 조선 사대부의 시대정신이다. 조선의 임금이라도 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면 자리를 보전할 수 없었다. 등거리 외교를 펼치다가 인조반정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재조지은은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 지식인들은 명에게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대명의리론’으로 이어지고, 재조지은의 주요 행사인 만동묘 제사는 대한제국이 망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중국은 긴 호흡으로 역사를 본다. 임진왜란의 중국측 기록은 항왜원조전(抗倭援朝戰)이다. 일본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란 뜻이다. 그러면 6.25전쟁은 어떻게 기록돼있을까. 이번에는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구한다는 의미의 ‘항미원조전(抗美援朝戰)’이다. 긴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격이 같다. 그리고 적어도 북한에 대해서는 두 번의 재조지은을 베푼 셈이다. 재조지은을 베풀었으니 혹시 어떠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채권채무의 요인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되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강해질 때마다 한반도는 위기를 맞았다. G2로 부쩍 강대해진 중국과 전통의 우방 미국 사이에서 한국은 새우등 처지이다. 400년 전 조선의 군주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치른 딜레마와 다를 바가 없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은 우여곡절 끝에 결정됐지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배치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략적 모호성’이란 애매한 전략으로 대응하다 보니 정부 여당 내에서도 갈피를 제대로 못잡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 권으로 성장했다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우리의 숱한 고난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민족의 장래를 길게 내다보고 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남북 관계 개선이 필요한데 정작 정부는 “통일은 대박”이라는 주장만 하고 그 이후 진척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국민은 소리만 요란한 구호가 아닌 실질적인 성과를 원하고 있다. 꽉 막혀 있는 남북관계에 답답해 하고 있다. 올 4월에 실시한 D일보의 여론조사에서 한국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현안은 ‘남북관계 개선’으로, ‘한미동맹 지속’보다 높게 나타났다.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응답도 80.6%나 된다.

모든 역사는 결코 과거가 아닌 오늘을 사는 현재의 역사다. 중국의 시주석은 400여년 전 역사적 사건을 끄집어 내 오늘의 한중관계를 이끌고자 했다. 남북관계도 긴 역사의 안목에서 접근해야 한다. 정권유지의 이슈로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 민족의 에너지를 결집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통렬한 반성이 필요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