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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에 햇살을
2015년 01월 21일(수) 00:00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는 뉴욕 부럽지 않은 세계적인 문화도시다. 백악관, 국회의사당, 링컨 기념관, 워싱턴 기념탑 등이 밀집한 정치 1번지이지만 빼어난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들이 도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19개의 미술관·박물관으로 구성된 스미스소니언 인스티튜션(이하 스미스소니언)과 국립미술관, 필립스컬렉션, 코코란 갤러리 등은 워싱턴 D.C의 아이콘이다.

그중에서도 스미스소니언 산하 국립 초상화 갤러리(The Smithsonian’s National Portrait Gallery )는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미술관이다. 미술품이나 유물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 여느 미술관과 달리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곳이다. 미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통해 미국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과 같은 연말연시에는 미 전역에서 몰려든 관람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아름다운 예술품과는 거리가 먼, 그것도 추운 겨울에 유독 초상화갤러리를 찾는 이유는 새로운 한해를 전후로 성찰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에서부터 마틴 루터 킹 목사, 할리우드 스타 마를린 먼로, 전설의 야구영웅 베이브 루스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수백 여 명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얼굴’을 대면하는 관람객들은 그들의 생애와 발자취를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뜻깊은 시간을 갖는다. 찰나의 희로애락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등이 담긴 초상화는 보는 이의 내면을 비추는 일종의 거울인 것이다.

최근 기자는 10년 전 워싱턴 초상화갤러리에서 접했던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과 국립 광주박물관에서다. 지난 신정연휴에 방문한 이중섭 미술관의 이중섭 ‘자화상’ (48.5×31cm·1955년 작) 앞은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빛바랜 종이에 연필로 그린 자화상은 이 화백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자신을 미쳤다고 한 세간의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치열한 내적 의식과 꼼꼼한 필치로 그린 작품. 화려한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관람객들은 거장의 위엄에 압도된 듯 쉽게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지난 18일 막을 내린 국립 광주박물관의 ‘공재 윤두서 전’ 도 마찬가지였다. 날카로운 눈빛과 한올 한올 살아 있는 듯한 긴 수염의 공재 자화상(38.5x20.5cm)은 미술사적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경건하게 했다. 전시장 한켠에는 공재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했다고 하는 백동경(白銅鏡)도 진열돼 있어 분위기를 더욱 숙연케 했다.

박물관을 나오는 길, ‘문득 내가 자화상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40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지라’는 말이 있지만 진지하게 얼굴을 들여다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올해는 어떤 얼굴로 한 해를 보낼지 한번쯤 되돌아 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하루 긍정의 마인드로 사는 게 우선일 듯 싶지만.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