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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살아 있음을 기뻐하라-장석주 시인
2022년 09월 01일(목) 23:00
가을 아침을 살아서 맞는 일은 기적이다. 가을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질서를 세우며 강한 고요를 안쪽에서부터 확장해 간다. 하늘은 청명하고, 모과나무 가지에서 모과가 익어갈 때 제 궤도를 도는 행성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물은 언제나 더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한해살이풀들은 시들어 버석거리고, 철새는 기하학적 편대를 이루고 북쪽에서 날아온다. 하지만 저탄장에 쌓인 석탄은 더 이상 까매질 필요가 없고, 젖소에게서 짜낸 젖은 더 이상 하얘질 필요가 없다.

가을은 외롭고 슬픈 영혼들의 합주로 완성된다. 달이 가을밤의 지휘자라면, 물은 겸손하게 낮은 곳에서 저음의 음역대를 맡고 밤의 정적을 깨며 우는 풀벌레들은 높은 소프라노 파트를 맡는다. 가을에는 누군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대성당의 늙은 신부이든 해안에 뒹구는 조약돌이든 상관이 없다. 누구라도 내 고해성사를 받아 준다면 나는 조금 더 단순해지고, 조금 더 착해질 것이다.

우리는 단 하나의 삶을 살지만 동시에 하나의 삶에서 변주된 여러 삶을 산다. 여럿의 삶을 살다 보니 여러 자아가 필요하다. 내 자아의 가장 밑바닥에는 시골 사람이 산다. 시골은 장소나 자연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고, 잃어버린 낙원이며, 회복되지 않는 상처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풀숲에서 새 둥지를 찾고, 봉분이 무너진 무덤가 구덩이에서 뱀이 떼를 지어 엉겨 있고, 비 온 뒤 마당에서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걸 보며 자랐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연민하는 일은 시골 사람의 덕목이다. 시골을 떠나며 내 안의 시골은 멸실되고, 시골에서 길러진 덕목은 사라졌다. 이건 내 안에 자연의 신비와 알 수 없음을 잃어버린 탓이다.

이제 나는 규격화되고 목적 지향적인 삶을 지향하는 도시 사람이다. 나는 했다. 도시 사람은 도덕적 완성이나 영혼의 점진적 성장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도시에서의 성공은 자신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뜻이다. 도시 사람은 땅에 씨를 뿌리거나 열매들을 땀 흘리며 손으로 딴 적이 없다. 그들은 마트에서 잘 익은 복숭아와 향기로운 포도를 고르고, 도정된 쌀과 포장육을 산다.

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늘 시끄러운 도시에 산다. 나는 눈 먼 자들의 시장에서 거울을 팔며 냉혈한처럼 복잡한 계산을 처리한다. 주중엔 인터넷으로 먼 나라의 전쟁 뉴스를 검색하고 국내 주가의 등락을 주시한다. 주말엔 경마장엘 가거나 굴 요리를 먹고 친구 집으로 몰려가 포커게임을 한다. 나는 재산을 탕진하거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도 않았다. 허영의 깃발이 나부끼는 도시에서 나는 성공을 거뒀지만 정작 내가 갈망하는 삶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가을이 열매들을 데리고 돌아온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만물은 만물로써 무르익고, 슬픈 것들은 슬픈 것대로 제 영혼을 정돈한다. 내 영혼이 숱한 실수를 저지르고도 끝내 성숙하지 못했음은 슬프다. 잘못 살았다, 잘못 살았다. 회한은 잘 벼린 칼이 되어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벤다. 가을밤의 풀벌레들은 다른 세상을 포기하라,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이 세상 너머의 다른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는 모른다.

생명의 불꽃을 소진한 것들에게 가을은 제자리를 찾아 준다. 열매들은 제 무게를 못 이겨 땅에 떨어지고, 이 생이 처음이라고 울던 풀벌레들은 돌연 죽음을 맞는다. 무릇 생명을 품은 것들이 제 생명을 연소하며 장엄한 소멸을 맞는다. 내 안의 생체 시계는 외로움을 동력 삼아 째깍거리는데, 나는 외로움을 도약대 삼아 질문을 던진다. 나는 삶을 두 번 살 수 있을까? 두 번째 삶이 주어진다면 또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똑같은 삶을 두 번 살더라도 나는 실수를 되풀이하고 허둥거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슬플 때 홑이불을 적시며 우는 여린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 지금 이 찰나의 삶을 생동으로 죽음을 영원한 부동으로 분별하고, 작은 생명들을 더 연민으로 품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