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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호남의병대장 고광순]을미사변에 분노…기우만과 항일 의병을 이끌다
<24> 구한말 외로운 전쟁에 나선 의병장들 <3>
담양서 태어나 고경주 양자로 입적…임란 의병장 고경명 후손
동복서 왜적 대파 후 구례 연곡사에 본영 설치 군량·무기 모아
왜적 야습으로 연곡사에서 전사…1962년 건국공로훈장 추서
2021년 12월 17일(금) 09:00
고광순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된 담양 창평 포의사 전경. 찾아오는 이 없이 건물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한말 의병은 임진왜란 의병, 병자호란 의병보다 외로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보인 19세기 말부터 1910년 8월 경술국치까지 일본군의 치밀한 추적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 조정의 외면 또는 비협조 속에 재래식 무기를 들고 소수의 병력으로 맞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서 다룬 한말 남도 의병장은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심수택(심남일), 임병찬, 전수용, 이기손, 박영근, 신덕균, 김준, 양진여·양상기 부자, 안규홍, 오성술, 기산도, 황병학, 이대극 등 17명이다.

포의사 현판.
고종으로부터 총리호남의병대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고광순은 1848년(헌종 14년) 음력 2월 7일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13개월 만에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이름은 고정상, 어머니의 성은 김씨다. 8세에 아저씨 고경주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임란 의병장 고경명 아들 의열공 학봉 고인후의 봉사손(조상의 제사를 맡아 지내는 자손)이 됐다. 자는 서백, 호는 녹천을 썼고, 글은 외조부인 김경찬에게 배웠다. 15세에 상월정이라는 정자에 올라 10년 동안 문을 닫고 학문에 매진할만큼 고집도 셌다.

담양 창평 포의사 앞의 고광순사적비. 지난 1970년에 세웠는데 비문은 이은상씨가 지었다.
양모 허씨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렀으며,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구제하며 덕과 의리가 주변에 알려져 이름이 높았다. 광순의 유명세와 관련 일화도 있다. 당시 집권세력 중 한 명이었던 민응식도 광순의 덕망과 인격을 들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에 간 광순을 만나 수석 선발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한 선비가 100만냥을 민응식에게 바쳤으며, 장원급제는 그 선비에게 돌아가고 광순은 떨어졌다. 그 길로 민응식의 집으로 간 광순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민응식을 꾸짖고 그 뒤부터 과거 응시를 포기했다.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기우만, 기삼연 등과 연락해 의병을 모았으나 고종이 보낸 선유사 신기선의 설득에 기우만이 의병 해산을 명령하자 귀가했다. 광순은 고종의 명이 아니라 왜적과 척신들의 협박 때문이라고 믿고 의병을 일으킬 기회만 엿봤다. 1896년부터 1906년까지 11년간 사람들 만나고 동지들 규합하는데 공을 들였다. 가장 뜻이 잘 통하는 사람은 광순보다 한 살 아래인 인봉 고제량으로, 기량이 뛰어났다.

광순이 57세 때인 1905년 8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 최익현이 거병했다. 고제량과 함께 순창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최익현이 전주·남원진위대에 체포됐다는 사실을 알고 기우만, 백낙구 등과 거병에 합의하고 1906년 9월 20일 군사를 모아 순천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소식이 알려지면서 백낙구와 그를 따르던 7명, 기우만 등이 체포되면서 광순은 홀로 거병을 준비했다.

고종은 고광순의 거병 소문을 듣고 1906년 12월 비밀리에 조서를 내려 그에게 총리호남의병대장을 명했으며, 이에 광순은 토적을 맹세했다. 1906년 12월 11일 담양군 창평면 저산 아래 분암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거병한 광순은 대장에 오르고, 부장에 고제량, 선봉장에 고광수, 좌익장에 고광훈, 우익장에 고광채, 참모에 박기덕, 호군 윤영기, 종사 신덕균, 조동규를 각각 임명했다. 저산 봉우리에 의병기를 세우고 이씨제실을 대장소로 삼았다. 남원에서 거병한 양한규(내금위장 등 벼슬 역임, 을사조약 후 통감부 설치되자 1,000여 명과 거병)가 합동작전을 요청해왔는데, 양한규가 먼저 12월 30일 남원진위대 병사들이 휴가 간 틈에 100명의 정예군과 참봉 유병두의 군사 50여 명 등을 이끌고 남원읍내로 쳐들어가 남원성을 장악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던 양한규가 총탄에 숨지면서 다시 성을 내주고 의병들은 흩어졌다. 광순은 뒤늦게 성에 도착했으나 성 위에서 사격하는 적들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후퇴한 뒤 창평으로 돌아왔다.

적의 감시로 본진의 유지가 어려워지자 군사를 정돈하던 광순은 1907년 3월 13일 화순, 능주의 선비들과 화순읍으로 진격해 일본인 주택과 상점 10여 호를 불태운 뒤 화순 동복으로 진군하다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들과 맞붙었으나 패하고 후퇴했다. 이 소식을 듣고 몽암 신덕균이 종제 상철과 의병대에 참가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광순의 의병은 이미 순천쪽으로 도망간 후였다. 그 뒤 광순은 유격전으로 전술을 변경했다. 한편 분노한 일본 경찰은 창평에 있는 광순의 집 20여 칸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해 8월 광순은 안면이 있던 고광봉의 소개로 찾아온 신덕균 등 인재를 규합하고, 쓰라린 패배를 경험삼아 새로운 총기를 제조하고, 여러 전법 훈련에 나섰다. 또 고제량의 지도로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 주역에서 곧 회복된다는 의미로 고무·격려의 의미)이라고 세 글자를 쓴 불원복기를 만들어 군기로 사용했다. 8월 4일 지리산으로 들어갈 것을 결심한 광순은 축문을 지어 제를 올린 뒤 부대를 재편성했다. 광순이 도독을 맡고, 고제량과 박성덕을 도총으로, 신덕균을 선봉으로, 윤영기를 참모로 삼았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다가 신덕균이 화순 동복 습격을 제안해 이른 새벽 동복분파소에 대포를 쏘며 들어가 후군까지 합세해 총공격하자 왜경들이 광주로 도주했다.

별다른 전과 없이 광순은 남원을 거쳐 곡성으로 와 격문을 곳곳에 보내 민심을 달래고 백성들의 사기를 돋우자 의병 수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8월 11일 오후 연곡사에 도착해 본영을 설치하고 영·호남에 격문을 보내 군량과 무기를 모으는데 안간힘을 썼다. 광순은 구례군 광의면에 있던 매천 황현에게 격문을 써달라고 부탁함과 동시에 의병을 소규모 부대로 재편성했다. 당시 충남 회덕의 의병장 김동신은 순창우편취급소, 경무고문분파소 등을 습격한 뒤 지리산에서 유격전을 펴다 세가 불리해지자 구례군 토지면 문수암에 일시 머물렀는데, 동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뒤쫓아온 일본군이 문수암에 불을 질렀다. 이후 일본군이 화개동에 주둔하면서 지리산에 본거지를 둔 의병들은 그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광순은 9월 9일 새벽 화개동의 일본군을 습격해 무기를 노획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물러섰다. 이 때 윤영기는 다른 부대를 이끌고 연곡사 뒤 상치재를 넘어가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신덕균은 무기와 군량을 모으러 광주, 순천, 광양 등지로 나가 있었다. 그 3일 전에는 영광 이대극의 요청으로 합동유격전을 위해 일부 의병을 파견, 본진에는 광순과 함께 고제량 등 부하 10여 명만 남아 있었다.

고광순이 의병 본진으로 삼았던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는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현재는 순절비만 남아있다.
그런 와중에 일본군은 9월 10일 영·호남의 병력을 집결해 쌍계사를 거쳐 연곡사로 향하고 있었다. 광주 주둔 기노중대 및 오카자키 보좌관보가 이끄는 경찰, 진해만 포부대에서 파견된 도코로 소대 등은 9월 11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하고 집중 사격을 시작했다. 30여 분간의 사격으로 초토화가 된 연곡사에서 광순은 동생 광훈에게 의병 명부를 주고 피할 것을 지시한 뒤 총을 들고 단신으로 일본군을 향해 뛰어갔다. 그는 1907년 9월 11일 오전 7시 고제량 등 따르던 의병 10여 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일본 경찰의 ‘전남폭도사’에서 ‘연곡사 전투’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907년 10월 16일(양력으로, 녹천 고광순의 행적을 적은 공행장에 쓰인 음력 9월 11일과 5일 차이가 나는데, 이는 어느 한 편의 착오로 보인다.) 광주의 기노 중대 및 오카자키 보좌관보 이하의 경찰대는 화개시장 및 쌍계사 부근을 수색, 17일 다시 전진하던중 진해만 중포부대에서 파견된 도코로 소대와 만났다. 오전 6시 도코로 소대는 연곡사를 공격, 도주하는 적을 추격해 난사했는데 고광순 이하 13명을 죽였다. 기노 중대는 오전 11시 칠불사를 습격했으나 적은 도주하고 없었다.”

광순 등의 시체는 임준홍이라는 농부가 자신의 채소밭에 옮겨놨으며, 일본군이 사라진 뒤 탈출한 광훈은 흩어진 의병들과 광순을 찾아 성난 눈을 부릅뜬 채 숨진 광훈의 눈을 감긴 뒤 매장했다. 매천 황현과 박태현이 찾아와 무덤에 곡하고 칠언시를 지어 애도했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한데 나라 위해 한평생을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마를 흩어 저 벼논두렁에 누워있고 까마귀 떼만이 나무그늘로 날아와 앉는구나. 우리처럼 글만 하는 선비들은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 높은 조상(고경명, 고인후 등)의 가풍을 이은 드높은 명성을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니 이는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은 때문이라.”

이듬해인 1908년 4월 광순의 종형 광윤, 고제량의 아들 용주는 광순과 고제량을 각각 창평과 화순으로 이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고광순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또 담양에 포의사를 짓고 사적비를 세웠다. 사적비에는 광순이 좌우명처럼 되 뇌인 말을 이은상이 노래로 만들어 적었다.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이라는 세 글자를 써넣은 깃발, 즉 ‘불원복기’를 군기로 사용했는데, 이 기의 원형은 지금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고씨 종가에 보관돼 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