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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평전 - 신병주 지음
2021년 02월 26일(금) 00:00
조광조(1482~1519)는 무오사화로 유배됐던 사림파의 핵심인물 김굉필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에 정진했다. 29세인 1510년(중종 5년) 과거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34세 1515년 (중종 10년)에는 알성시에서 2등으로 급제한다.

이후 언관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됐다. 화려하게 중앙 정계에 등장한 조광조는 본격적으로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개혁정치에 나섰다.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야만 민보정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연을 활성화했다.

조선시대 전문가이자 ‘역사저널 그날’의 신병주 교수가 펴낸 ‘조광조 평전’은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조광조의 삶과 사상을 담았다. 조광조는 가슴에 성리학적 이상을 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매진했지만 그의 이상은 당대 사회에서 수용되지 않았다. 꿈은 좌절됐고 역사는 그를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개혁의 정점은 정국공신 개정이었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정국공신에 책봉된 사람 가운데 공이 없는데도 인맥으로 공신이 된 이가 많았다. 조광조는 공이 없는 이들의 훈작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종이 개국공신 개정을 선언한 지 불과 4일 뒤 상황이 급반전한다. 중종은 조광조 세력을 전격적으로 체포한다. 붕당을 만들어 자기 세력을 형성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며 자기들만 요직을 차지한다는 명목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조광조를 실패한 개혁가로 두지 않았다. 그가 추구했던 개혁정치를 인정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비록 조광조의 개혁이 당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가 보여준 결기와 개혁 열망은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겨레출판·1만8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