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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전설·민담…나뭇결에 담긴 사람살이
[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책] 나무를 심은 사람들
고규홍 지음
2020년 01월 31일(금) 00:00
한 쌍의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모습은 볼수록 신비롭다. 순천 송광사 천자암 곱향나무
전북 진안군 평지리 이팝나무군에는 아이들의 꿈을 지키는 풍요로운 표상이 깃들어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전북 진안 평지리에는 이팝나무군이 있다. 평지리 마령초등학교 정문 곁으로 수령이 300년쯤 되는 이팝나무가 모여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기무덤이 형성된 것은 이팝나무의 수령과 때를 같이한다. 조선시대 흉년이 들면 가장 갓난아기들이 가장 많은 타격을 입었다. 어른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버티면 되지만 아기들은 젖 한 방울 나오지 않은 어미의 입을 물고 있다 영양실조로 죽게 된다. 굶어 죽은 아이들을 위해 사람들은 쌀밥나무인 이팝나무를 심었다.

이곳의 이팝나무군은 봄이면 꽃대궐을 이룬다. 슬픔의 전설을 간직한 채 피워 올린 꽃대궐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애닯은 상징이다. “아가야! 살아서 먹지 못한 쌀밥, 죽어서라도 실컷 먹으라!” 오늘의 이팝나무는 아이들의 꿈을 지키는 풍요로운 표상이기도 하다.

‘나무는 살아 있는 사람의 역사’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나무에는 이 땅에 살았던 이들의 수다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의미다. 나무인문학자 고규홍은 매일같이 나무를 찾으며 나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광주일보에 ‘고규홍의 나무생각’을 연재하고 있는 그는 천리포수목원 이사와 한림대·인하대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최근에 펴낸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나무와 사람의 이야기다. “사람은 나무를 심고, 나무는 사람을 지켜주며 나무와 사람은 그렇게 이 땅에서 오랫동안 더불어 살아왔다. 돌아보면 나뭇결에 담긴 사람살이를 탐색하고, 나무를 심은 사람이 나무에 남긴 뜻을 살피는 것은 이 땅의 인문 역사를 탐구하는 일과 다를 게 없다.”

책은 20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만났던 나무가 주제다. 저자는 책을 엮기 위해 사료는 물론이고 문중 문서, 전설, 민담 등 다양한 자료와 설화를 모았다. 이를 토대로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며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았는지 들려준다. 임금부터 시작해 당대의 뛰어난 학자와 선비, 고승대덕, 장삼이사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이 등장한다.

명문 ‘토황소격문’으로 알려진 최치원은 현실 정치와 세상사에 염증을 느껴 은둔을 자처했다. 합천 학사대 전나무(천연기념물 제541호)는 그의 지팡이가 싹이 돋운 나무라는 전설이 있다. 육두품 출신이었던 그가 올린 개혁안이 성골과 진골 출신 귀족들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자, 현실 정치를 떠나 은거를 결심한다. 해인사 요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지팡이를 땅에 꽂은 거였다.

담양 면앙정 숲에는 네 그루의 굴참나무가 있다.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송순이 정자를 짓고 심은 나무가 굴참나무다. 대나무나 소나무와 같은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가 아닌 흔한 굴참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따른다는 철학을 대변한다.

저자는 지금의 굴참나무 수령은 200년으로, 400년 전쯤 건립된 면앙정을 보건대 송순이 심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다. 그럼에도 “뜸직하게 자라난 굴참나무는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며 순리에 맞춰 살아가는 자연의 지혜를 웅변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나주 오씨 집성촌인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 상구마을에는 숲이 조성돼 있다. 천연기념물 516호인 호랑가시나무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싸웠던 이곳 출신 오득린이 심었다고 전해온다. 이순신은 흉탄에 맞은 후 조카인 완에게 “내가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고 오득린에게 나를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하라”며 숨을 거뒀다. 그 전장에서 장애를 입은 오득린은 후일 고향으로 돌아와 팽나무, 느티나무, 호랑가시나무 등 10여 그루 나무를 심었다.

거창의 연수사 은행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는다. 이곳에는 고려 왕족과 혼인한 여인과 관련한 애잔한 전설이 내려온다. 아들을 낳았지만 고려가 패망하자 절에 숨어든 여인은, 스님의 권유로 아들을 불가에 귀의시킨다. 모자가 헤어질 때 아들은 전나무를, 어머니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후일 전나무는 죽고 은행나무만 살아남았는데, 가끔 “모정을 드러내듯 은행나무는 가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전해온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아마도 이것일 테다. ‘세상의 모든 삶은 나무와 더불어 이어졌고 나무를 통해 기억된다.’ 오늘 심는 한 그루의 나무는 필경 역사가 되고 우리 삶의 필수과정인 것이다.

<휴머니스트·2만3000원>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