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피로 물든 ‘5월 광주’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 꽃피우다
<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 ⑨ 5·18, 그 현장을 걷다
5월16일 옛 전남도청 앞 광장서
‘민족민주화성회’개최 횃불행진
광주에 軍 투입, 작전명 ‘화려한 휴가’
시민 향해 조준된 무차별 집단 발포
분노한 학생·시민들 ‘시민군’ 조직
계엄군 진압 맞서 민주주의 쟁취
5월16일 옛 전남도청 앞 광장서
‘민족민주화성회’개최 횃불행진
광주에 軍 투입, 작전명 ‘화려한 휴가’
시민 향해 조준된 무차별 집단 발포
분노한 학생·시민들 ‘시민군’ 조직
계엄군 진압 맞서 민주주의 쟁취
![]() 2016년 11월19일 광주시 동구 금남로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들이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도청 앞 분수대에 횃불을 켜고 열었던 ‘민주성회’를 재현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오.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 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이끌며 횃불대행진을 앞두고 열변을 토한 고 박관현 열사의 연설이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5·18 직전까지 광주시내 각종 시위를 주도, ‘광주의 아들’로 기억되고 있다.
이날은 ‘5·16군사쿠데타’ 1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남대·조선대 등 대학생 3만여명은 오후 4시 도청 앞 광장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개최했다. 사흘 연속 민족민주화성회가 열린 것이다. 이들은 오후 7시30분 횃불 점화에 앞서 “횃불행진을 통해 잠자는 시민의식을 일깨워 이 땅의 어둠을 밝히자”고 다짐했다. 이날 밤 도청 앞 분수대 주변은 타오르는 횃불로 대낮같이 밝았으며, 시민들은 하나둘 횃불 주위로 모여 하나가 됐다.
5월 17일, 광주는 조용했다.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사흘간의 민족민주화성회와 가두시위를 마치고, 이날은 휴식에 들어갔다.
반면, 신군부는 분주했다. 오전 10시 국방부에서는 계엄사 전군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오후 9시40분 임시국무회의에서는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이 의결됐다. 그리고 이날 밤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자정을 전후해 김대중·문익환·이영희 등 전국의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으로 강제 연행 됐다. 광주지역 사회·학생운동 지도자 상당수도 검거됐다.
신군부는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대를 투입했다. 특히, 서울과 광주는 주요 공격 목표였다. 서울에는 1·3·5·9·11·13공수여단이,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35대대가 배치됐다. 전남대와 조선대는 이들 공수부대에 의해 점령됐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학교는 쉬었지만 학생들은 쉬지 못했다. 이틀 전인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횃불 성회에서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는 약속 때문이었다.
오전 9시40분 약속을 기억한 전남대 학생들은 하나둘 학교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을 막아선 계엄군(7공수여단 33대대)은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진압봉을 휘둘렀다. 만류하는 시민까지도 두들겼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행은 5·18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강경 진압에 당황한 일부 대학생들은 정문 앞 다리 밑 용봉천으로 뛰어내렸다. 지금은 복개돼 자취를 감췄지만, 그 땐 다리가 있었고, 그 아래로 실개천이 흘렀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계엄군은 이들을 쫓아왔다. 오후 3시 유동3거리, 7시 광주고, 8시15분 금남로 카톨릭센터에서도 시민과 계엄군은 충돌했다. 계엄군은 대검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 계엄사령부는 광주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겼다. 11공수여단도 증파됐다.
‘타당 탕 탕’ 5월 19일 오후 4시50분 광주시 동구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총성이 울렸다. 5·18 최초 발포였다.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이 발포로 조대부고생 김영찬 군이 총상을 입었다.
앞서 이날 새벽 3시 증파된 11공수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오전 11시30분께 시위진압에 나섰다. 잔인한 살육전이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는 여학생, 버스기사, 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생들 모두가 진압 대상이었다. 그들은 작전명 ‘화려한 휴가’를 피로 보냈다.
무자비한 진압은 시민들을 분노케했다. 수 만명이 금남로를 메웠다. 시위의 중심세력도 대학생에서 시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전두환 타도’를 외쳤다. 정시채 전남도 부지사, 이대순 전남도교육감, 정웅 31사단장, 윤흥정 계엄분소장 등은 이날 오전 10시 ‘광주지역 기관장 회의’를 열고 “공수부대를 시내에서 철수시켜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공수부대 철수 대신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더 투입했다.
5월 20일,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경찰이었다. 밤 9시5분께 노동청 앞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 미처 피하지 못한 경찰 4명이 치여 숨졌다. 밤 11시께에는 시민 2명이 사망했다. 3공수여단이 광주역 광장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것이다. 광주에서의 최초 집단 발포였다.
앞서 오후 6시40분께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 택시를 몰고 나와 전조등 켜고 경적을 울리며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까지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를 기념해 이날을 ‘민주기사의 날’로 정했다.
다음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자비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참담한 비극’이 광주를 엄습했다. 이날 새벽 4시30분께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가 태극기에 덮인채 손수레에 실려 금남로에 나타났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만명이 항쟁에 동참했다. 금남로에는 10만여명이 운집했다.
오후 1시, 전남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애국가에 맞춰 일제히 총성이 터져 나왔다. 시민들을 향해 조준된 무차별 집단 발포였다. 금남로는 삽시간에 피바다를 이뤘다. 이 집단 발포로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시각 전남대 정문에서도 집단 발포가 자행됐다.
“이렇게 당할 순 없다.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한다”며 분노한 청년들은 무기를 찾아 나섰다. 광주 근교의 화순·나주·장성·영광·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화순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경찰지서와 예비군 무기창고에서는 카빈소총 등을 확보, 청년들에게 분배됐다. ‘시민군’의 탄생이었다. 오후 5시30분께 시민군이 도청으로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조선대로 총퇴각했다.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 전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냈다. 광주시민의 위대한 승리였다. 광주시는 이날을 ‘광주시민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다.
이날 총격전으로 병원마다 총상환자로 만원이었다. 병원 앞에는 아주머니·아가씨들이 헌혈을 위해 몰려들었다. 심지어 어린이까지 팔을 걷고 달려왔다.
5월 22일, 광주는 해방됐다. 그리고 대동세상이 열렸다. 광주시민의 높은 시민정신을 돋보였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는 한편 시내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에서는 강도·살인 등 강력사건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도청 옥상에는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조기와 검은리본이 게양됐다. 평화적 해결을 찾고자 수습대책위도 꾸려졌다. 하지만 계엄군은 광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막아버렸다. 광주는 고립됐다.
다음날 아침 광주시내는 여전히 해방감과 승리감으로 들떠 있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다.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밤 새워 경계근무를 한 시민군들의 아침식사였다. 상가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께 도청 앞 광장은 모여든 시민들로 가득찼다. 족히 5만은 넘을 인파였다.
전남도청 맞은편 상무관에는 시신들이 무명천에 덮여 뉘어져 있었다.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신도 수십구였으며, 무명천 위로 검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영령을 모시는 분향대가 입구에 설치돼 향이 피워졌고,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가 뿌려졌다. 분향하려는 시민들이 늘어선 줄은 상무관 바깥 분수대까지 광장을 가로질러 길게 구불구불 이어졌다.
광주 시내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시외는 공수부대의 보복과 학살로 울부짖었다. 5월 24일 오후 1시30분께 11공수여단은 광주시 남구 진월동 원제마을 앞 원제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어린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총격으로 중학교 1학년 방광범 군이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효덕초등학교 부근 마을 어귀에서 놀던 어린이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민가를 향해서도 총을 쐈다.
전남도청 앞 광장은 5·18의 심장부였다. 이 곳에서는 전날에 이어 이날도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궐기대회에서는 전두환 허수아비 화형식이 이뤄졌다. 이후 5·18민주광장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연세대생 이한열, 명지대생 강경대, 전남대생 박승희 등 수 많은 민주열사들의 노제가 열리는 성지가 됐다.
해방 나흘째인 5월 25일, 광주는 빠르게 질서를 회복해갔다. 시장과 상점들은 문을 열었고, 경운기에 실려온 채소가 공급됐다. 슈퍼마켓과 구멍가게에서는 사는 쪽이나 파는 쪽 모두 사재기를 방지하려 노력했다. 담배는 1인당 한갑씩만 팔았다. 해방기간 광주시내 범죄발생률은 평상시 정부가 치안을 유지할 때보다 훨씬 낮았다. 행정과 치안 관청의 기능이 멈춘 가운데서 보여준 시민들의 높은 도덕적 자율성은 피로 찾은 자유와 해방을 지키려는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외국 기자들은 질서정연한 시민들의 생활을 목격하고 놀라워했다.
오후 3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5·18 피해 상황이 보고됐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가 520명, 경상자가 2170명, 사망자는 70여명이었다. 이날 밤 수습위원회 온건파는 모두 전남도청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밤 10시, 최후까지 싸우려는 항쟁지도부가 결성됐다. ‘민주투쟁위원회’다. 김종배·허규정·정상용·윤상원·박남선·김영철·이양현·윤강옥·박효선·정해직·김준봉·구성주 등으로 지도부가 구성됐다.
앞서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으로 불리는 광주소탕작전을 확정했다. 작전 개시는 ‘5월27일 0시1분 이후’로 결정됐다.
5월 26일 새벽 4시 무렵 도청이 발칵 뒤집혔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 봉쇄지역 세 곳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밀려들어온다는 급보가 무전기를 타고 들어왔다. 계엄군 진입 소식으로 시민군에게는 비상령이 떨어졌다. 수습위원들은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죽음의 행진’을 결의했다. “우리들이 총알받이가 됩시다. 광주시민들이 다 죽어가는데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읍시다.” 길거리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뒤따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수백명의 대열이 됐다.
무장시민군은 전투조직(기동타격대)으로 전환됐다. 4차·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도 잇따라 개최됐다. 오후 5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도청에서 외신 기자회견을 열었고, 1시간 뒤 수습위원회도 마지막 회의를 했다. 그렇게 도청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저물어갔다.
5월 27일은 이슬비가 어둠을 적셨다. 도청·분수대 광장·금남로는 인적이 끊겼다. 새벽 3시30분께 도청에 머물던 사람들과 YMCA·YWCA에서 들어온 지원자들에게 총과 실탄이 지급됐다. 새벽 3시50분께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 여인의 피맺힌 절규는 광주사람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새벽 4시 갑자기 도청 내부의 전등이 모두 꺼져버렸다. 그 순간 마지막 방송도 끊겼다. 그리고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새벽 5시10분께 YMCA·YWCA·계림초·전일빌딩·관광호텔 등이 계엄군에게 장악됐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왔다. 1980년 5월 열흘에 걸친 광주시민의 무장투쟁도 막을 내렸다.
/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이끌며 횃불대행진을 앞두고 열변을 토한 고 박관현 열사의 연설이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5·18 직전까지 광주시내 각종 시위를 주도, ‘광주의 아들’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신군부는 분주했다. 오전 10시 국방부에서는 계엄사 전군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오후 9시40분 임시국무회의에서는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이 의결됐다. 그리고 이날 밤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자정을 전후해 김대중·문익환·이영희 등 전국의 민주인사들이 예비검속으로 강제 연행 됐다. 광주지역 사회·학생운동 지도자 상당수도 검거됐다.
신군부는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대를 투입했다. 특히, 서울과 광주는 주요 공격 목표였다. 서울에는 1·3·5·9·11·13공수여단이,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35대대가 배치됐다. 전남대와 조선대는 이들 공수부대에 의해 점령됐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학교는 쉬었지만 학생들은 쉬지 못했다. 이틀 전인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횃불 성회에서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는 약속 때문이었다.
오전 9시40분 약속을 기억한 전남대 학생들은 하나둘 학교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을 막아선 계엄군(7공수여단 33대대)은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진압봉을 휘둘렀다. 만류하는 시민까지도 두들겼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행은 5·18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강경 진압에 당황한 일부 대학생들은 정문 앞 다리 밑 용봉천으로 뛰어내렸다. 지금은 복개돼 자취를 감췄지만, 그 땐 다리가 있었고, 그 아래로 실개천이 흘렀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계엄군은 이들을 쫓아왔다. 오후 3시 유동3거리, 7시 광주고, 8시15분 금남로 카톨릭센터에서도 시민과 계엄군은 충돌했다. 계엄군은 대검 사용도 서슴지 않았다. 계엄사령부는 광주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겼다. 11공수여단도 증파됐다.
‘타당 탕 탕’ 5월 19일 오후 4시50분 광주시 동구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총성이 울렸다. 5·18 최초 발포였다.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이 발포로 조대부고생 김영찬 군이 총상을 입었다.
앞서 이날 새벽 3시 증파된 11공수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오전 11시30분께 시위진압에 나섰다. 잔인한 살육전이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는 여학생, 버스기사, 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생들 모두가 진압 대상이었다. 그들은 작전명 ‘화려한 휴가’를 피로 보냈다.
무자비한 진압은 시민들을 분노케했다. 수 만명이 금남로를 메웠다. 시위의 중심세력도 대학생에서 시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전두환 타도’를 외쳤다. 정시채 전남도 부지사, 이대순 전남도교육감, 정웅 31사단장, 윤흥정 계엄분소장 등은 이날 오전 10시 ‘광주지역 기관장 회의’를 열고 “공수부대를 시내에서 철수시켜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공수부대 철수 대신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더 투입했다.
5월 20일,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경찰이었다. 밤 9시5분께 노동청 앞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 미처 피하지 못한 경찰 4명이 치여 숨졌다. 밤 11시께에는 시민 2명이 사망했다. 3공수여단이 광주역 광장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것이다. 광주에서의 최초 집단 발포였다.
앞서 오후 6시40분께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 택시를 몰고 나와 전조등 켜고 경적을 울리며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까지 차량시위를 벌였다. 이를 기념해 이날을 ‘민주기사의 날’로 정했다.
다음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자비와 평화와는 거리가 먼 ‘참담한 비극’이 광주를 엄습했다. 이날 새벽 4시30분께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가 태극기에 덮인채 손수레에 실려 금남로에 나타났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 수십만명이 항쟁에 동참했다. 금남로에는 10만여명이 운집했다.
오후 1시, 전남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애국가에 맞춰 일제히 총성이 터져 나왔다. 시민들을 향해 조준된 무차별 집단 발포였다. 금남로는 삽시간에 피바다를 이뤘다. 이 집단 발포로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시각 전남대 정문에서도 집단 발포가 자행됐다.
“이렇게 당할 순 없다.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한다”며 분노한 청년들은 무기를 찾아 나섰다. 광주 근교의 화순·나주·장성·영광·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화순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경찰지서와 예비군 무기창고에서는 카빈소총 등을 확보, 청년들에게 분배됐다. ‘시민군’의 탄생이었다. 오후 5시30분께 시민군이 도청으로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조선대로 총퇴각했다.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 전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냈다. 광주시민의 위대한 승리였다. 광주시는 이날을 ‘광주시민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다.
이날 총격전으로 병원마다 총상환자로 만원이었다. 병원 앞에는 아주머니·아가씨들이 헌혈을 위해 몰려들었다. 심지어 어린이까지 팔을 걷고 달려왔다.
5월 22일, 광주는 해방됐다. 그리고 대동세상이 열렸다. 광주시민의 높은 시민정신을 돋보였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는 한편 시내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에서는 강도·살인 등 강력사건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도청 옥상에는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조기와 검은리본이 게양됐다. 평화적 해결을 찾고자 수습대책위도 꾸려졌다. 하지만 계엄군은 광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막아버렸다. 광주는 고립됐다.
다음날 아침 광주시내는 여전히 해방감과 승리감으로 들떠 있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다.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밤 새워 경계근무를 한 시민군들의 아침식사였다. 상가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께 도청 앞 광장은 모여든 시민들로 가득찼다. 족히 5만은 넘을 인파였다.
전남도청 맞은편 상무관에는 시신들이 무명천에 덮여 뉘어져 있었다.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신도 수십구였으며, 무명천 위로 검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영령을 모시는 분향대가 입구에 설치돼 향이 피워졌고,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가 뿌려졌다. 분향하려는 시민들이 늘어선 줄은 상무관 바깥 분수대까지 광장을 가로질러 길게 구불구불 이어졌다.
광주 시내는 평화가 찾아왔지만, 시외는 공수부대의 보복과 학살로 울부짖었다. 5월 24일 오후 1시30분께 11공수여단은 광주시 남구 진월동 원제마을 앞 원제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어린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 총격으로 중학교 1학년 방광범 군이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효덕초등학교 부근 마을 어귀에서 놀던 어린이들에게도 총격을 가했다. 민가를 향해서도 총을 쐈다.
![]() 국립 5.18민주묘지 |
전남도청 앞 광장은 5·18의 심장부였다. 이 곳에서는 전날에 이어 이날도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궐기대회에서는 전두환 허수아비 화형식이 이뤄졌다. 이후 5·18민주광장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연세대생 이한열, 명지대생 강경대, 전남대생 박승희 등 수 많은 민주열사들의 노제가 열리는 성지가 됐다.
해방 나흘째인 5월 25일, 광주는 빠르게 질서를 회복해갔다. 시장과 상점들은 문을 열었고, 경운기에 실려온 채소가 공급됐다. 슈퍼마켓과 구멍가게에서는 사는 쪽이나 파는 쪽 모두 사재기를 방지하려 노력했다. 담배는 1인당 한갑씩만 팔았다. 해방기간 광주시내 범죄발생률은 평상시 정부가 치안을 유지할 때보다 훨씬 낮았다. 행정과 치안 관청의 기능이 멈춘 가운데서 보여준 시민들의 높은 도덕적 자율성은 피로 찾은 자유와 해방을 지키려는 긍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외국 기자들은 질서정연한 시민들의 생활을 목격하고 놀라워했다.
오후 3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5·18 피해 상황이 보고됐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가 520명, 경상자가 2170명, 사망자는 70여명이었다. 이날 밤 수습위원회 온건파는 모두 전남도청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밤 10시, 최후까지 싸우려는 항쟁지도부가 결성됐다. ‘민주투쟁위원회’다. 김종배·허규정·정상용·윤상원·박남선·김영철·이양현·윤강옥·박효선·정해직·김준봉·구성주 등으로 지도부가 구성됐다.
앞서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으로 불리는 광주소탕작전을 확정했다. 작전 개시는 ‘5월27일 0시1분 이후’로 결정됐다.
5월 26일 새벽 4시 무렵 도청이 발칵 뒤집혔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 봉쇄지역 세 곳에서 탱크를 앞세우고 밀려들어온다는 급보가 무전기를 타고 들어왔다. 계엄군 진입 소식으로 시민군에게는 비상령이 떨어졌다. 수습위원들은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죽음의 행진’을 결의했다. “우리들이 총알받이가 됩시다. 광주시민들이 다 죽어가는데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읍시다.” 길거리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뒤따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수백명의 대열이 됐다.
무장시민군은 전투조직(기동타격대)으로 전환됐다. 4차·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도 잇따라 개최됐다. 오후 5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도청에서 외신 기자회견을 열었고, 1시간 뒤 수습위원회도 마지막 회의를 했다. 그렇게 도청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저물어갔다.
5월 27일은 이슬비가 어둠을 적셨다. 도청·분수대 광장·금남로는 인적이 끊겼다. 새벽 3시30분께 도청에 머물던 사람들과 YMCA·YWCA에서 들어온 지원자들에게 총과 실탄이 지급됐다. 새벽 3시50분께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 여인의 피맺힌 절규는 광주사람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새벽 4시 갑자기 도청 내부의 전등이 모두 꺼져버렸다. 그 순간 마지막 방송도 끊겼다. 그리고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새벽 5시10분께 YMCA·YWCA·계림초·전일빌딩·관광호텔 등이 계엄군에게 장악됐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왔다. 1980년 5월 열흘에 걸친 광주시민의 무장투쟁도 막을 내렸다.
/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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