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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라도의魂-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
⑧ 더불어 사는 세상…김만덕과 덕진여사, 박호련
굶주린 백성 살린건 ‘나눔’ 실천한 또 다른 백성이었다


유통업으로 모은 재산 제주도민 살려
정조때 여성 최고의 벼슬에 올라
덕진여사
영암 남·북 잇는 다리 놓기 위해
2019년 09월 09일(월) 04:50
기근으로 제주백성들이 굶주리자 김만덕은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뭍에서 쌀을 사들여 제주사람을 살린다. 제주시 건립동 김만덕기념관에는 김만덕의 기민구휼 장면이 형상화돼 있다. /제주=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자비를 들여 영암 덕진다리를 건립한 은혜를 기려 세운 ‘대석교창주덕진지비’




제주 의인 김만덕의 묘비




제주 의인 김만덕의 묘비








“남의 굶주림을 자기 일로 여겨(飢思若己·기사약기) / 여기저기 나누어줘 가난한 이 구제했네(傳施恤貧·전시휼빈) / 모든 사람이 입 모아 칭송하니(萬口咸誦·만구함송) / 남기신 덕은 날로 새로워라(遺德日新·유덕일신)”

광주 서창의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의 은혜를 기리는 ‘불망비’ 내용이다.

영암에는 덕진여사의 기부정신을 기리는 ‘덕진지비’가 있다. 그리고 제주에는 추사 김정희가 만덕의 선행을 기리며 써주었다는 ‘恩光衍世’(은광연세·은혜의 빛이 세상에 퍼지다)라는 석각이 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실천한 선각자들이다. 이들의 특이한 공통점은 부자나 지배층이 아닌 ‘평범한 백성’이었고, 이들을 추모하기 시작한 이들 또한 ‘함께 살아간 백성들’이었다는 것이다.



◇‘기부와 나눔의 표상’ 여성 최초 CEO 김만덕

제주도는 놀러가면 아름답고 행복하지만, 그 곳이 생활터전이라면 감옥이 된다. 20여년 전만해도 제주지역 대학생들조차 육지에 나가보는 게 꿈이었다. 섬이라는 ‘닫힘’이 이유다.

제주 역사를 돌아보면 그 아름다운 풍광 속에 도사린 피눈물의 비린내와 짠내에 몸서리치게 된다. 몽골의 침략, 왜구의 습격, 그리고 끔찍한 4·3 사건 등 풍파가 그치지 않았다. 특히 섬의 특성상 태풍·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해마다 거듭되는 재앙의 섬이었다.

계정대기근(1713~1717), 임을대기근(1792~1794)은 재앙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때 제주 인구의 30%와 23%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임을대기근 때 불세출의 여성이 나타난다. 김만덕이다.

만덕은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은 뒤 어머니마저 곧 세상을 뜨면서 고아가 됐다. 살아남고자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결코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사또가 수청을 들라고 명령하자 소복을 입고 들어갔단다. 기절초풍한 사또가 “이게 뭔 일이냐”고 손사래를 치자, 만덕은 “저는 원래 양민이었습니다. 사또를 모신 뒤엔 자결을 하려고 소복을 입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보통 여인은 아니었음이다.

그는 끈질긴 노력 끝에 양인 신분을 되찾았다. 안락한 삶을 누릴 기회를 버리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한다. 용기와 기지로 양인의 신분을 회복한 만덕은 돈을 벌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일념으로 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육지 상인들과 거래한다.

만덕은 이재에 밝았으며, 수완도 탁월했다. 그가 재산을 만드는 데 전념한 분야는 유통업이었다. 육지의 쌀 등과 제주 특산물의 거래를 주도하고, 여관업·창고업 등을 벌여 육지 상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돈을 벌었다.

사업이 번성하던 무렵 임을대기근이 제주를 덮쳤다. 1792년 임자년 이후 제주도의 기근 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당시 제주목사는 “쌀 2만여 섬을 배로 보내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다 죽을 것입니다”라고 울먹이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조정에서도 부랴부랴 구호 식량을 보냈지만 적지 않은 배가 험한 바다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하는 설상가상의 상황이 이어졌다.

제주가 생사의 기로에 선 순간 만덕은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제주사람 살리기에 나섰다.

“만덕이 천금을 희사하여 쌀을 뭍에서 사들였다. 모든 고을의 사공들이 때맞춰 이르면 만덕은 그중 십 분의 일을 빌어다가 그의 친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제공했다. 그리하여 부황(浮黃) 난 자가 그 소문을 듣고 관가 뜰에 모여들기를 마치 구름 같았다.”<채제공 ‘번암집’>

굶주린 제주 백성들은 “만덕이 우리를 살렸다”라고 칭송한 것은 당연했다. 이 소식은 조정에 알려졌고, 정조는 법으로 금지돼 있던 제주여성 김만덕의 출도를 허용, 궁궐로 불러들여 내의원 의녀 수장인 ‘의녀반수(醫女班首)’에 제수하고 그의 소원이었던 금강산 유람을 허락했다.

정조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조선 팔도 곳곳에서 활개 치던 탐욕스러운 사람들, 탐관오리는 말할 것도 없고 광에 쌀이 썩어나도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내놓지 않던 지주들과 부자들, 거상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만덕은 돈만 많은 졸부가 아니었다. 훌륭한 마음에 앞서 재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경영철학은 ‘싸게, 그러나 많이 판다’, ‘알맞은 가격으로 사고 판다’, ‘정직한 믿음을 판다’였다. 그리고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고 일갈했다.

김만덕은 불우한 환경과 여성을 억압하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해 불합리한 규범과 맞서 새로운 것에 과감히 도전하고 개척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조선 최초의 여성 CEO이자 경제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뛰어난 사업가였고, 애써 모은 재산의 사회환원을 실천한 자선사업가였다. 또 주체적인 삶의 개척자, 나눔과 봉사의 표상으로 제주여성을 대표하는 선구자다.

제주도민은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성금을 모아 사라봉공원에 모충사를 세웠다. 모충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김만덕 묘가 있다. 바로 옆에는 추사 김정희가 만덕의 선행을 기리며 써주었다는 ‘恩光衍世(은광연세·은혜의 빛이 세상에 퍼지다)’가 써 있는 석각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대정신으로 선양하기 위해 김만덕기념관을 건립했다. 또 그의 기일인 10월22일이 들어있는 10월 넷째주를 ‘김만덕주간’으로 지정해 만덕제 봉행, 만덕상 시상, 나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인근에는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김만덕객주가 있다.



◇영암 덕진여사의 기부정신

영암에는 덕진면이 있다. 덕진여인과 덕진다리에서 유래했다.

때는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암읍에서 10리쯤 떨어진 덕진강변(지금의 영암천)에 주막이 하나 있었다. 덕진이라는 여인이 일찍이 혼자되어 이 곳에서 나그네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살았다. 나주에서 영암·해남·강진 등 남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덕진강을 건너야 하는데, 비만 오면 물이 불어 사람이 건널 수가 없었다. 며칠씩 발이 묶였다. 가끔 고집을 부리고 건너다가 변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바쁘다고 초조해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여인은 자기 일처럼 함께 걱정을 해주곤 했다.

어느날 석공이 주막에서 발이 묶였다. 여인이 조바심 난 석공에게 슬쩍 물었다. “이 곳에 다리를 놓는다면 얼마나 들까요?” “모르긴 몰라도 삼백냥은 족히 들거요.” 석공의 대답이었다. 여인은 삼백냥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여러해 동안 나그네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아왔던지라 그들을 돕고 싶었다. “지금은 그만한 돈이 없지만 푼푼이 모으면 될 수 있을 거여.” 그러면서 여인은 그날부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빈항아리를 마련해두고, 일이 끝나면 벌어들인 돈을 항아리에 담았다. 동전은 바닥을 채우고 차츰 불어났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여인의 고운티도 많이 사라졌다. 반면에 항아리는 동전으로 가득 채워져갔다. 여인은 항아리의 돈이 삼백냥쯤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당한 날을 기다려 고을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한밤중에 항아리를 땅에 묻어 두었다.

며칠이 지났다. 상주도 없는 초라한 상여 한 채가 동구 밖으로 나갔다.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 글쎄, 아무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네.” 아낙들은 갑작스런 여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세월이 흘러 고을 원님이 바뀌었다. 원님이 부임한 첫날 밤, “원님, 제 소원 하나 들어 주십시오.” 원님은 소복 입은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원님,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여기서 십리쯤 가는 덕진리에 살았던 덕진이라는 여인이옵니다.” 여인은 자기 사정을 이야기했다. “제 소원은 영암과 덕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다리를 놓기 위해 평생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염라대왕의 부르심을 받고 이승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살던 집의 부엌에서 서쪽으로 다섯걸음만 가서 땅을 파 보십시오. 항아리 하나가 있을 겁니다. 원님, 부디 저의 소원을 풀어주십시오.” 말을 마친 여인은 큰 절을 하고 물러갔다.

꿈을 깬 원님은 너무도 생생하여 다음날, 그 곳을 찾았다. 여인의 말대로 다섯걸음을 가서 파보니 항아리가 있었고, 그 돈으로 다리를 놓게 되었다. 여인의 갸륵한 뜻을 살려 다리의 이름을 덕진교라 부르게 됐다. 또 마을에서는 여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대석교 창주 덕진지비(大石橋創主德津之碑)’를 세우고, 매년 음력 5월5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덕진여인은 다리를 놓으면 오히려 주막 장사가 안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러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대가없이 내놓아 다리를 놓으려 했다. 이것이 진심이 담긴 기부정신이다.

영암 출신 우승희 전남도의원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대가 없이 내놓음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존경받고 후세까지 기억되는 일”이라며 “덕진여인의 기부정신이 기업의 사회공헌과 개인의 재능기부 활성화로 이어진다면 최저생활보장이라는 공공복지의 사각지대를 채우는 한편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로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창나루 마지막 뱃사공 박호련

광주시 서구 서창치안센터 건너편 길가에는 2개의 비가 있다. ‘박호련시혜불망비’다. ‘나눔을 베푼 박호련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서창면민이 1925년과 1929년 두차례 세운 비석이다. 고관대작도 아니고 지역의 명망가도 아닌 뱃사공에게 마을사람들이 비석을 2개나 세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웃의 따뜻함이 전해진다.

박호련은 광주 극락강 서창나루 마지막 뱃사공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선행은 중외일보 1930년 1월 22일자 ‘희세(稀世)의 자선가 박호련씨 기념비, 광주 서창면 12구민의 감사루(感謝淚)의 결정(結晶)으로’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박씨는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 부채를 물려받아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내와 함께 고향을 몰래 떠났다. 타지에서 3년여 동안 생활하다 지쳐 돌아와 채권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뱃사공부터 시작해 정미소를 운영하는 등 고생 끝에 천석꾼이 될만한 돈을 벌었다. 당시 서창지역이 가뭄 등으로 생활고를 겪는 동네사람들에게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고 두 번에 걸쳐 쌀을 내놓고 돈까지 내놓는 등 나눔을 실천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야반도주를 했던 그는 몇 해 동안 타향을 전전하다 그래도 고향만한 데가 없다 싶어 다시 돌아왔다. 물론 한 뙈기의 논밭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루터 뱃사공이었다. 비록 천한 일이었지만 몸에 밴 근검 덕에 1920년대 중반 제법 큰 돈을 모았다.

흔히 젊어서 고생하면 나이들어 인색해진다고 하지만 박호련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보릿고개 때마다 굶주린 이웃들을 구했다. 사람들도 그 덕을 잊지 않았다. 시혜불망비 2기가 세워진 까닭이다. 이 비에는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시절의 기록, 이웃의 따뜻함이 진하게 묻어있는 기록, 그렇기 때문에 초라하고 볼품 없지만 관찰사·양반의 업적을 기린 어떤 비석보다 더욱 빛나는 시혜불망비. 비석에 담긴 박호련의 아름다운 마음이 전해진다.

/제주·영암=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