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호남 유학생들의 항일독립정신 ‘민주주의’로 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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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호남 유학생들의 항일독립정신 ‘민주주의’로 이어지다
<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 ⑦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1919년 도쿄 2·8선언, 광주 출신 최원순 등 조선유학생들 조직
3·1운동 기폭제· 임정수립 계기…무심한 세월 속 현장 사라져
정광호, ‘선언서’ 몰래 들여와 배포…‘광주 3·10만세운동’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나주 넘어 전국·해외로 활활 타올라
2019년 08월 26일(월) 04:50
일본 도쿄에 있는 재일본한국YMCA의 주재형 총무가 YMCA 2층에 마련된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에서 2·8독립선언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본 도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나라가 힘들 때마다 청년학생들이 앞장섰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엔 적국의 심장 도쿄에서, 90년 전엔 의향 광주에서 청년학생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꿈꾸는 청년들이었다.

조국의 미래는 청년의 가슴과 눈빛에 있다고 한다. 청년의 삶과 조국의 미래는 뗄레야 뗄 수 없기 때문일 게다. 청년들은 역사의 물줄기에서 청년의 본분과 사명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일제 강점기 어둠 속에서도, 4·19와 5·18 폭압 속에서도, 6·10과 촛불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청년들은 역사의 부름에 기꺼이 화답했다. 청년들에겐 시대의 고민에 주저하지 않는 정의로움과 미래를 향한 열정이 있다. 청년의 기백을 잃지 말자.

‘2.8독립선언서’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외친 조선YMCA 터.


◇적국의 심장에서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전(全) 조선청년독립단은 아(我) 이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꼭 이루기를 기약)하기를 선언하노라.”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서’ 머릿글이다. 최팔용·윤창석·김도연·이종근·이광수·송계백·김철수·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춘 등 독립단 대표 11명의 서명이 들어간 선언문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8일 “100년 전 오늘, 조선 유학생들이 함박눈 내리는 도쿄 조선YMCA 회관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며 “이날 유학생들이 낭독한 ‘조선청년독립선언서’는 우리 독립운동의 화톳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들 조선청년독립단 열한 분의 이름 하나 하나를 기억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들 외에도 당시 조선YMCA 회관에는 600여명의 조선유학생이 의기를 보여줬다. 청년들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 최후의 1인까지 열혈을 흘릴 것, 영원한 혈전을 불사할 것”이라며 궐기했다.

일제의 심장 한복판에서 분출된 이들의 결기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됐고,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2·8독립선언 근간에는 호남 유학생들이 있었다. 구심점 역할은 조선YMCA에서 일을 하며 와세다대에서 고학하던 광주 출신 최원순이었다. 그는 강진 출신 김안식(메이지대), 나주 출신 김현준(동양대), 화순 출신 정광호(메이지대), 광주 출신 장영규 등과 독립운동에 뜻을 모았다. 이들은 선배인 고창 출신 백관수(정측영어학교)를 찾아가 의기투합했다.

이들을 고무시킨 건 1918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론’이었다. 이들은 민족자결론에 의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조직, 자금, 선언문 작성 등 역할 분담을 했다. 최원순과 정광호 등은 조직화 임무를 받았다.

최원순 등 조선유학생 10여명은 광주 출신 김희술의 도쿄 하숙집에서 1주일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1만여장의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그리고 영문으로 번역해 각국 대사관과 영사관, 외국 언론기관에 발송했다. 일어로 된 선언서는 일본 정계와 언론기관 등에 우편으로 보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YMCA 회관에서는 ‘대한독립만세’가 울려퍼졌다.

2·8독립선언은 침략국 일본 제국주의 수도 한 복판에서 일어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족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한 달 뒤 국내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2·8독립선언서는 3·1선언서의 기초가 됐다.

지난 4월 이들을 만나러 2·8독립선언 현장을 찾았다. 일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니시간다(西神田) 3-3-12. 당시 YMCA자리엔 세탁소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YMCA회관이 불타 없어지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도쿄의 도시정비사업으로 주변이 확 바뀌었다. 건물 오른쪽으로는 니혼바시(日本橋)강이 흐르고, 그 위로 1964년 도쿄 올림픽에 맞춰 개통된 수도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정면으로 센슈(專修)대학이 보였다’는 기록은 센슈대학 정문 위치가 바뀌어 찾을 수 없었고, 주변은 고층 빌딩가로 변해 100년 전 조선청년들의 결기가 서린 독립만세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외친 조선YMCA 터.


◇도쿄 2·8선언이 광주 3·10만세운동으로

“아! 우리 동포들아 눈을 들어 세계의 대세를 보라… 기회는 두 번 오지 아니하니 이 때를 맞이하여 맹렬히 일어나 멸망의 길로부터 자유의 낙원으로 뛰어나가라.”

1919년 3월10일 오후 3시, 광주 부동교 밑 작은 장터에 모인 1000여명에게 배포된 격문 내용 중 일부다. 장터에 모여든 인파는 격문을 받아들고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광주의 3·1운동인 ‘3·10광주만세운동’이다.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조들의 ‘3·1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100년 전 광주에서도 골목골목 울려퍼졌다. ‘독립’의 함성은 수백명에서 수천명으로 늘었고, 광주를 넘어 전남 곳곳으로 메아리쳤다. 다만, 날짜가 3월1일 아닌 3월10일이었다.

광주에서는 1919년 2월 중순께 도쿄 유학생이던 정광호가 ‘2·8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서울에 사는 김범수·김기명 등 호남 출신 학생들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배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 장성으로 내려와 친지 김기형의 집에서 일경의 감시를 피해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인쇄했다.

민족의 기상을 세계 곳곳에 알리기 위해 ‘2·8독립선언서’가 서슬퍼런 일본의 감시의 눈을 피해 복사됐고, 태극기는 수피아여고 강당에서 만들어졌다. 수피아여고 교사들은 또 파리에서 열린 만국 강화회의에 대해 설명하며 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유도했다.

거사일은 장날이었던 1919년 3월8일로 계획됐지만,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최흥종 등이 붙잡히면서 3월10일로 연기됐다. 거사 당일 장터에는 1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양림동 쪽에서 숭일학교·수피아여고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으며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 농민들이 가세했다. 만세 행렬이 늘어나자 일본군 무장 기마 헌병대가 출동했고, 100여명이 체포됐다.

하지만 만세 함성은 16일까지 광주 곳곳에서 이어졌다. 광주 뿐 아니라 담양, 화순, 곡성, 영광 등으로 퍼졌다.

광주만세운동으로 강석봉·김강·김범수 등 100여명이 투옥됐으며, 수피아여고 교사인 박애순과 학생 등 28명도 붙잡혀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수피아여고에는 당시 선배들의 기개를 본받기 위해 광복 50주년인 1995년 교정 초입에 7.3m 높이의 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3월1일에 만세운동 재연하고 있다. 여학생 4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청동상으로 제작한 기념비에는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학생 20명과 교사 2명, 졸업생 1명 등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민족 독립에 바친 청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차별과 억압에 대한 분노와 울분이었다. 일본 남학생들이 한국 여고생 3명을 희롱하는 사건으로 시작된 불꽃은 들불이 돼 전국으로 번졌다.

11월3일은 개천절(음력 10월3일)이자, 일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일(명치절)이 겹친 날이었다. 이날 행사에서 학생들은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연주됐지만 침묵했고, 하굣길에 가두시위를 벌였다.

거리로 나선 학생들은 “신천지에 휘날리는 우리 동포야 /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이 왔구나 / 무등산에서 단련한 기술로 / 용감히 적군을 물리치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학생들이 충장로를 지날 때 시민들은 각목과 장작개비를 내줬다. 학생들은 중심가를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이날의 시위는 일제의 차별적 식민지 교육, 그에 저항하기 위한 학생들의 비밀 결사, 통학열차에서의 충돌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만세운동으로 불꽃처럼 피어오른 것이었다. 신문의 보도는 당시의 시위가 3·1운동과 비슷했다고 평가했다.

경찰의 탄압은 불에 기름을 붓는 셈이었다. 경찰은 시위에 참여한 학생 70여명 중 60여명을 구속했다. 옥중에서도 투쟁은 계속됐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구호·단식 등의 방법으로 저항했다.

일반 시민들도 공분했다. 특히 3·1운동 10년째를 맞아 학생 뿐 아니라 사회단체와 국민들도 참여했다. 이후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등이 참여하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들은 언론·집회의 자유와 식민지 교육 철폐,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주장했다.

독립운동은 그해 12월과 이듬해 1월까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10년 전 열린 3·1운동 이후 가장 오랫동안 대규모로 열린 항일 운동이었다. 학교는 190여개, 5만명이 넘는 학생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길은 해외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해방 이후 학생들의 항일독립정신은 ‘민주주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일본 도쿄=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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