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영국에서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대학 은사는 학생들에게 때때로 화폐와 박물관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한 나라를 가장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지폐를 보거나 박물관에 가 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이 귀에 꽂혀 외국 여행을 할 때면 그 나라의 화폐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떤 인물이 화폐의 주인공인지를 보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 지향하는 가치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거야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23일로 발행 10년을 맞는 5만 원권은 최고액권이자 유일하게 여성인 신사임당이 주인공이란 점에서 단연 관심을 끌 만하다. 신사임당은 아들인 율곡 이이(5000원권)와 함께 모자(母子)가 나란히 지폐에 등장하는 지구촌 유일의 인물이기도 하다.

5만 원권은 탄생부터 녹록지 않았다. 정부는 2009년 5만 원권과 10만 원권을 발행하기로 하고 여론조사를 통해 인물 선정에 들어갔는데 10만 원권 인물로 선정된 김구 선생을 두고 이념 논쟁이 일면서 발행이 취소돼 5만 원권이 최고액권의 자리에 올랐다. 신사임당에 대해서도 가부장적 가치관에 기초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전형이란 일부 비판이 있었다.

오만 원권은 현금 없는 사회를 앞당겼다는 긍정론과 지하경제를 키운 주범이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우리 생활상을 많이 바꿨다. 두툼한 지갑 대신 지폐 몇 장만 끼우고 다니는 얇은 머니클립이 직장인들 사이에 대세가 됐다. 또한 경조금 단위를 최소 5만 원으로 급격히 올려놓았다. 2011년 김제의 마늘밭에서는 110억 원어치의 5만 원권 다발이 발견돼 지하 경제를 키운 주범이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어찌 됐든 10년 동안 발행된 5만 원권은 약 182조 원(37억만 장)이나 됐다. 세로로 세우면 지구를 130번 감을 수 있는 분량이다. 시중에 유통 중인 화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금액 기준으로 84.6%, 장수 기준으로 36.9%로 단연 1위다. 오만 원권이 ‘대장 화폐’로 위상을 다지는 사이 신사임당의 이미지도 현모양처에서 슈퍼 워킹맘으로 탈바꿈했다.

/장필수 전남본부장 bun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