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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운 변호사] 합리적 의심
2019년 05월 27일(월) 00:00
내게는 ‘합리적 의심’이라는 제목의 책이 두 권 있다.

한 권은 ‘O. J. 심슨은 어떻게 무죄가 되었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추리 소설이다. 두 권 모두 변호사가 썼다.

한 권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 O. J. 심슨 사건을 다루고 있고, 다른 한 권은 사람들이 산낙지 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두 사건 모두 다 피고인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렇기에 산낙지 ‘살인 사건’은 옳지 않은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O. J. 심슨 사건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한 때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O. J. 심슨은 살인자일까, 아닐까? O. J. 심슨은 아내인 니콜 심슨에 대한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배심원 중 한 명은 ‘심슨이 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없는 입증을 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라고 인터뷰했다.

그렇지만 이후 니콜 심슨의 유족이 O. J. 심슨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는 그의 살해 혐의가 인정돼 유족에게 배상금으로 총 3350만 달러, 우리 돈으로 370여 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2003년에 불이 난 차량에서 한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부검해보니 충격에 의한 심장 파열이 직접 사인이었다. 부인이 유력한 용의자였다. 경찰은 남편 이름으로 여러 개의 생명 보험이 가입돼 있고, 부인이 내연남에게 ‘남편을 죽여달라’고 말을 했다는 사실 등을 확인하고 보험금을 노린 사건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차에 불을 내는 데 쓰인 경유 통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혐의를 뒷받침할 자백이나 직접 증거를 찾지 못해 무혐의 처분되었다. 충격에 의한 심장 파열이 직접 사인인데, 부인이 심장을 파열시켰다는 점을 입증하기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다.

2년 뒤 여자는 남편 이름으로 가입된 보험과 관련해 보험사와 국가를 상대로 1억 3000여만 원의 보험금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조정을 통해 보험사 한 곳으로부터 5000만 원을 받았고, 나머지 상대방들로부터는 33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렇지만 항소심에서는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부인이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형사 재판에서는 무죄라는 판단을 받았지만 민사 재판에서는 유죄라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대법원에 상고했는지, 대법원이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언뜻 보면 모순되는 결과가 아닐 수 없지만, 이는 민사 소송과 형사 소송에서 입증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형사 소송법은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범죄 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합리적 의심은 일종의 허들이다. 이를 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죄의 심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죄를 선고하여야 한다.

합리적 의심 원칙은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것이다.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언도 이와 같은 뜻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이 때문에 큰 도둑들, 큰 범죄자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글을 읽는 분들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합리적 의심 원칙 덕에 풀려난 도둑들이 매를 드는 경우, 말 그대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의 행태를 보이는 경우에는 화가 난다.

처벌을 피한 도둑들이 피해자를 무고, 명예 훼손, 모욕 등으로 고소할 때가 바로 그 때다.

도둑들이 고소라는 매로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입히고,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이야기할 수도 없게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이럴 땐 합리적 의심 원칙이 야속하면서 이런 생각도 든다. 당신의 무죄는 합리적 의심 없는 정도로 입증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