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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예향] 역사의 아픔, 기억하는 여행 ‘다크 투어리즘’ <상>
어둡고 아픈 역사에서 교훈을 얻다
M DMZ·서대문형무소·제주4.3평화공원·518민주묘지·여순사건 유적지 …
현대사의 비극·독립과 민주의 현장
평화·인권의 소중한 가치 되새겨야
2019년 05월 09일(목) 00:00
순천 팔마 종합 운동장 뒷편에 자리한 ‘여순사건 위령탑’.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역사 교훈여행’이다. 대표적인 장소로 DMZ(비무장지대)를 비롯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제주 4·3 평화공원, 국립 5·18 민주묘지, 여순사건 유적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여행자는 어둡고, 아픈 역사현장을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을 통해 교훈을 얻고 미래 비전을 세운다.

◇여순사건, 머나먼 해원의 길=“(영령들이시여!) 오늘 71년 만에 처음으로 봉행되는 여순사건 위령제와 해원음악제에 강림하시어 술 한 잔 드시고 신원(伸寃=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하시고, 노래 한곡 들으시고 신원하소서!”

지난 4월 14일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내 객사마당. 여순사건 영상기록위원회(이사장 조한규) 주관으로 열린 이날 ‘제1회 여순사건 해원음악제’에서 ‘산동애가’와 ‘부용산’ 등이 불려졌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위령제가 올려졌다. 초혼문에는 억울하게 군인들에게 희생된 영혼들을 애도하는 주민들의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해원은 ‘원통한(寃) 마음을 푼다(解)’는 의미다. 낙안면의 경우 ‘여순사건’ 당시 오금재 너머 신전·금산·평사·목촌 등 9개마을 주민들이 토벌군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돼 고동산과 금전산 골짜기에 매장됐다고 한다. 71년이 지났지만 여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여전히 역사의 뒤안에 묻혀있다.

‘여순사건’과 관련된 현장을 찾아가는 일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여수 ‘만성리 형제묘’(여수시 만흥동 149-1)를 우선 찾아간다. 검은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만성리 해수욕장과 마래 2터널을 잇는 해안 도로변에 놓여있다. 도로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산비탈에 ‘형제묘’라는 비석과 함께 제단을 갖춘 나지막한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1949년 1월 13일, 군 헌병들은 여수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부역혐의자로 수용됐던 주민 가운데 125명을 이곳에서 총살한 후 시신에 기름을 부어 사흘간 불태웠다. 나중에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유족들은 큰 봉분을 만들고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는 의미에서 ‘형제묘’라고 이름붙였다.

71년이 지나도록 아직 상처가 치유되지 못했고, 희생자들의 원통함조차 풀어주지 못한 ‘현재진행형’ 여순사건을 여행자를 위한 ‘다크 투어리즘’ 대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이정훈 여수고 교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연구원)는 지난 2016년 한국 지역지리학회지에 발표한 ‘여순사건 사적지에 대한 다크투어리즘 적용방안’에서 “여순사건에 대한 다크투어리즘 적용은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통한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교육’ 중심의 다크투어리즘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향후 이 지역의 다크 투어리즘 발전을 위해서는 ▲일관된 지역관광협의체 구성 ▲다크 투어리즘을 홍보하기 위한 지자체 차원의 문학작품 창작이나 다큐영화 제작지원 ▲여순사건 관련 특별법 제정 ▲추모공원 및 역사박물관 건립 ▲여순사건 관련 자료에 대한 디지털화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은 지난 16대, 18대, 19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무산됐고, 20대 국회에서도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 4·3평화공원내 ‘행방불명인 표석’.
◇비극적인 한국현대사 담긴 ‘제주 4·3’=여순사건과 제주 4·3은 하나의 끈처럼 이어져 있다. 제주 4·3 관련 유적은 제주도 전역에 산재해 있다. 이 가운데 ‘제주 4·3평화공원’(제주시 명림로 430)과 조천읍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 모슬포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묘역, 옛 일본군 알뜨르 비행장, ‘무명천 할머니’(진아영) 삶터(한림읍 월령리 설촌)를 찾아보았다.

평화기념관 내에 들어서면 가로놓인 ‘백비’(白碑)와 마주하게 된다. 봉기나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불려온 제주 4·3이 아직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여수 만성리에 세워진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여수시 만흥동 149-2) 뒷면이 텅비어있는 것과 닮은 꼴이다. 행방불명 희생자 묘역은 무수한 비석에 이름들이 새겨져있다. 예비검속과 대전, 경인, 제주, 호남, 영남지역 등지 형무소로 이송된 후 행방불명된 제주도민 3913위(位) 영혼을 기리는 공간이다.

‘백조일손지지’ 묘역은 4·3에 이은 제주인의 비극적 역사를 품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 경찰서에 요시찰인 모두를 구금할 것을 지시한다. 제주에서도 모슬포 347명 등 총 1200 여명을 예비 검속했다. 이들은 모두 경찰에 의해 총살됐다. 전쟁이 끝나고 1956년 5월에야 모슬포 희생자들의 시신수습이 허용됐다. 132개의 칠성판위에 뼈를 적당히 맞춰 묘역에 안장했다. 유족들은 ‘조상이 각기 다른 132 자손이 한날한시, 한곳에서 죽어 하나의 뼈로 엉키어 하나가 됐으니 한 자손으로 환생했다’라는 의미에서 묘역에 ‘백조일손지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주도에는 4·3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한 ‘4·3 길’이 조성돼 있다. 북촌마을과 안덕 동광마을, 남원 의귀마을, 한림 금악마을, 표선 가시마을, 오라동 등 6개 코스이다.

격동의 근 현대사를 겪은 한국은 '다크 투어리즘'의 대상이 될 많은 역사적 상처를 품고 있다,
◇독립운동가 피눈물 어린 ‘서대문 형무소’=대한제국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1908년 10월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대규모의 근대식 감옥을 세웠다. ‘경성감옥’이다. 1912년에 마포구 공덕동에 또 하나의 감옥을 신축한 후 ‘서대문 감옥’으로 이름을 바꿨고, 1923년 5월에 다시 ‘서대문 형무소’로 변경했다. 개소 당시는 1600㎡ 규모였으나 1930년대에는 5만1200㎡로 30배 이상 규모가 커졌다. 소위 ‘사상범’(독립운동가)들이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형무소 정문을 들어서면 눈앞에 전시관(옛 보안과청사)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사 벽면에 내걸린 대형 태극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전시관은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1908~1987)이라는 제목아래 형무소의 시대별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민족저항실Ⅰ’ 전시실에서는 독립운동가들과 관련된 주요 사건과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또 수감자 탈주를 막기 위해 양쪽 발목에 채웠던 형구인 ‘족쇄’가 전시돼 있다. ‘민족저항실 Ⅱ’ 전시실에 들어서면 온통 벽면이 독립운동가 수형기록표로 채워져 있다.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형무소 맨 안쪽에는 사형장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는 ‘통곡의 미루나무’가 서있다.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에 심은 포플러 나무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이 조국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에서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을 위해 산화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피눈물이 배어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올해 더욱 뜻 깊게 다가온다.

/글·사진=송기동 기자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