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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영화산업 역사와 함께 한 ‘신필름’ 전성시대
종합촬영소 갖춘 국내 최초 기업형 제작사… 배우·작가 발굴 앞장
1961년 신상옥 감독·최은희 주연 ‘성춘향’ 흥행 영화사 기틀 마련
계몽영화 ‘상록수’부터 군부정권 비판 ‘연산군’까지 200여편 제작
한국형 대중영화 새 흐름… 1972년 유신체제로 영화사 등록 취소
2019년 04월 24일(수) 00:00
1961년 5·16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력삼아 국가주도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추진했다. 이른바 조국근대화 프로젝트는 영화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가 대중홍보에 큰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군사정부는 영화를 통제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한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군사 정부는 영화사를 통폐합하고 자격을 제한하면서 정부의 취지를 잘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켰고, 영화산업 육성정책을 통해 정부에 호의적인 영화사에게는 많은 이익을 준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대다수의 영화인들이 정부의 정책에 소극적으로 따랐다.

그러나 신상옥은 적극적으로 정부의 시책을 따랐는데, 그것은 정부의 정책에 기대어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한국영화산업을 국제화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신필름’은 종합촬영소까지 갖춘 국내 최초의 대기업형 제작사였다. 많은 전속 배우와 감독, 시나리오 작가를 확보했고, ‘신필름 부설 연기실’을 두어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고 길러냈다.

신필름의 전성기는 1960년대 초중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선두에 ‘성춘향’이 있다. 1961년 설날을 전후해 개봉한 두 편의 춘향 영화의 격돌은 한국영화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신상옥·최은희의 ‘성춘향’과 홍성기·김지미의 ‘춘향전’은 두 작품 모두 ‘춘향전’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1950년대 후반 흥행계를 주름잡았던 두 감독이 연출하고 부인들이 주연배우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시네마스코프에 컬러를 시도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두 영화의 경쟁은 뜨거웠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영화를 구성하고 전개하는 과정이나 긴장감을 형성하는 연출력에 있어서 신상옥의 승리였다. 그리고 연기 대결에 있어서도 관객들은 떠오르는 스타인 김지미의 연기보다는 비록 나이가 많기는 했지만 춘향을 강단지게 소화해 낸 최은희의 연기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몽룡을 연기한 두 배우의 연기력에서도 홍성기의 신귀식에 비해 신상옥의 김진규가 존재감이 확실했다. 그렇게 ‘성춘향’은 요즘으로 따지면 천만영화의 흥행을 기록했다.

‘성춘향’의 기록적인 흥행성공으로 물적 기반을 확보한 신상옥은 ‘신필름’이라는 한국영화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영화사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그리고 신상옥·최은희 커플은 심훈의 계몽소설을 원작으로 한 ‘상록수’(1961)를 내놓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을 받게 된다. 박 대통령이 ‘상록수’를 보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새마을운동을 구상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상록수’에서 다뤄지고 있는 계몽적인 이미지들은 조국근대화를 부르짖고 있었던 군부정권에 부합했다.

신상옥·최은희는 군부정권의 등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근대화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영화를 한 편 더 만들게 되는데 ‘쌀’(1963)이 바로 그 영화다. 이 영화에서 최은희는 적극적인 성격의 여성 ‘정희’역을 맡아 박정희 정권의 산업근대화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얼굴이 된다. 이렇듯 신필름의 군부정권에 대한 비위맞추기는 1966년 9월 정권의 지원 아래 당시 상업은행 관리 하에 있던 2만5000 평 규모의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면서 그 위용이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러니까 신필름은 60년대 내내 2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내놓았고, 많은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으며, 다수의 영화들이 동남아 시장에 수출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연산군’(1961)
그러나 정부의 의도가 영화산업의 육성보다는 정부의 홍보수단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신상옥은 자신의 작품 속에 자신의 의도를 담아두는 방식을 통해 정부에 대해 항거하기도 했다.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의 이야기인 궁중 사극은 신상옥이 우회적으로나마 군부정권에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연산군’(1961)과 ‘폭군연산’(1962) 역시 신상옥의 의중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영화다.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지상목표로 삼았던 연산군에게서 박정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적인 예다. ‘연산군’(1961)은 박종화의 장편소설 ‘금삼의 피’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화려한 색채감과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초호화캐스트가 등장한다. 연산군으로 열연한 신영균은 이 영화를 통해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당대의 배우들이 총출연했다.

이는 신필름의 스타시스템이 작동한 결과였다. ‘연산군’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폭군연산’으로 이어졌고, 한국영화사의 ‘연산군’이야기는 이후에 ‘연산군’(1987·이혁수), ‘연산일기’(1987·임권택) 등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으며,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되었다.



신필름은 1960년대 초반 내내 화제작과 흥행작을 내놓게 된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상록수’(1961), ‘열녀문’(1962), ‘로맨스 그레이’(1963), ‘벙어리 삼룡’(1964), ‘빨간마후라’(1964) 등이 바로 그 영화들이다. 그러나 신필름의 절정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만드는 영화들마다 흥행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서 만든 영화들의 자본 회수율이 더뎠고, 제작 인력의 비대화와 영화 기자재에 대한 방만한 투자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필름은 60년대 중후반 중요한 영화들을 계속해서 내놓으며 한국영화의 1960년대 중흥기를 이끈 영화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필름은 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1975년 영화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에 검열을 받지 않은 장면이 들어 있다는 빌미로 신필름의 영화사 등록이 취소되기에 이른다. 그 뒤 최은희의 납북과 잇따른 신 감독의 납북으로 남한에서의 신상옥의 영화행보는 거의 일단락된다.

신필름의 영화사적 의의는 대형 영화스튜디오를 표방하며 스타시스템을 선보였다는 것과 다양한 장르에 걸쳐 한국형 대중 영화를 선보였다는 것, 그리고 탁월한 대중적 감각으로 당시의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