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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만세현장을 가다] <4> 목포
노동자 파업·항일투쟁, 청년·교인 만세시위로 번졌다
2019년 03월 05일(화) 00:00
1912년 촬영된 목포 정명여학교 기숙사.
조선시대 수상 운송의 요지였던 목포시는 1897년 개항 이후 호남 최대 무역 중심지이자 농수산물 집하의 주요 요충지로 부상했다. 목포부사(木浦府史)에 따르면 1897년 한국인 2600명, 일본인 206여명이었던 인구는 1910년 한국인 7076여명, 일본인 3494여명으로 늘어났고 1930년에는 한국인 2만3488명, 일본인 8003명이었다. 당시 목포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대다수 관리, 자본가들이었고 한국인들은 토지를 빼앗겨 어쩔 수 없이 모여든 항구 노동자들이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은 일본인에 대한 저항을 불러왔다. 3·1운동 이전에도 동맹파업, 반십장운동 등 생존권·항일투쟁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광주에 이어 두번째로 열린 전남 만세운동= 목포의 3·1운동은 광주와 양상이 비슷하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파한 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은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운동의 중심이 돼 펼쳐졌다.

목포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시도된 날은 1919년 3월21일이다.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에서 설립한 양동교회를 중심으로 목포정명여학교, 영흥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했다. 시위대가 목포경찰서장과 군수의 설득으로 해산했다는 신문 보도만 있을 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대대적인 시위는 4월8일 일어난다.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이었던 남궁혁은 2월 귀국해 죽마고우인 박상렬을 찾아 2·8독립선언과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전하며 서울 시위 계획에 대해 알린다. 이들 목포 만세 시위를 결의하고 오도근, 김영주, 박상렬·상술·상오 3형제 권영례, 오재복, 이금득 등을 모아 시위 계획을 세웠다.

경찰은 삼엄한 감시 속에서 이들은 4월8일을 거사일로 잡고 박상렬의 부친 박성칠이 운영하고 있던 신흥철공업주식회사의 등사판을 이용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조선독립광주신문 등을 인쇄했다.

같은 기간 양동교회에서는 이경필 목사와 함께 장로 곽우영, 서기견(서상봉), 서화일, 박여성, 박복영, 양병진, 강석봉 등도 시위 계획을 세운다. 거사 날짜는 남궁혁 등과 함께 하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는 각자 하기로 했다. 교회 지하실에서 태극기 등을 인쇄해 볏짚 안에 숨겨두며 감시를 피했다.

거사 나흘 전부터 태극기와 선언서가 일반인들에게 비밀리에 배포됐다. 일제 경찰은 눈치를 채고 삼엄한 경계를 펼쳤지만 청년들과 교인들은 목포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를 하는 방식으로 성사시키기로 했다.

4월8일 오전 10시 양동교회 교인들은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에, 오재복·이금득·박상오는 보통학교에 박상렬은 간이상업학교에 뛰어들어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자극 받은 학생들도 일제히 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일제는 총검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목포 시민들은 칼과 총을 빼앗아 대항하며 시위가 격렬하게 흘러갔다. 일제 경찰이 학생들을 짓밟자 정명여학교의 한 여교사는 “그만 때리라”며 웃옷을 벗고 앞으로 나서 경찰을 당혹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커다란 태극기를 들고 있던 서기견은 경찰의 칼에 의해 팔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시위 행렬은 장비와 인력을 앞세운 경찰을 이기지 못했다. 총참모 역할을 맡았던 박상렬이 체포되며 분위기가 꺾인다. 당시 80명이 구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여학생들은 이날 밤까지 소규모 시위를 이어나간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에 연행된 박상렬은 거꾸로 매달아 물을 붓는 고문 등을 당해 불구의 몸이 됐고 동생 상술은 정신 이상이 생겨 훗날 자결했다.

양동교회 교인들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태극기를 만들던 지하실. 지금은 교회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921년 또다시 울려퍼진 만세 함성=1919년 4월8일 시위의 불씨는 남아있었다. 1921년 11월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상해임시정부가 대표단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우리나라 곳곳에서는 성원을 보내는 시위 만세시위가 곳곳에서 열렸다.

목포 정명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천귀례도 성원을 보내기 위해 동료 13명과 함께 시위를 열기로 했다. 1921년 11월 13일 학교 기숙사에서 종이와 대나무로 태극기 수십장을 만들어 이튿날 정오께 교문을 나서며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경찰에 의해 당일 모두 체포됐다. 곽희주, 문복금, 김연순, 박복술은 징역 10월, 나머지 학생들은 징역 6월에 처해졌다.

정명여학교 소식이 전해지자 15일에는 영흥학교 학생들이 일어났다. 졸업생 양일석과 학생 김옥남, 박종근, 김용문, 최철근 등은 오전 10시 태극기를 학교 운동장에 뿌리고 교문을 벗어나 남교동·죽동 방면으로 향했다.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같은 진로였다. 일반시민들도 대열에 합류하며 힘을 보탰고 정명여학교 학생들도 대거 참가했다. 양일석 등 주동자는 모두 체포돼 양일석은 징역 10개월, 김옥남과 박종근은 징역 6개월 김용문은 징역 5개월 형을 받았다.

1919년 목포 기독교인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계획한 목포 양동교회. 양동교회 교인들은 영흥학교·정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나서며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선교사 사택 청장에서 발견된 조선독립광주신문= 1983년 정명여고 선교사 사택 보수공사 도중 천장에서 독립가, 3·1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문, 격문 등과 함께 ‘조선독립광주신문’이 발견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유일한 원본이다.

전남 3·1운동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독립광주신문’은 옛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회계직원이었던 황상호(당시 29세)가 만들었다.

1919년 3월10일 일어났던 광주만세운동이 일제 경찰의 대규모 탄압으로 동력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황상호는 남자간호사 홍덕주(29), 제약생 장호조(24)와 함께 병원 등사기를 이용해 ‘조선독립광주신문’ 300부를 비밀리에 발행하고 배포했다. 1919년 3월 11일자로 발행된 제1호는 전날 있었던 광주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전국만세시위 소식, 고종 독살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주의 등 국내외 정세에 대한 소식을 실으며 만세 시위 참여를 호소했다.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목포 선교사 사택 천장에서 발견된 ‘조선독립광주신문’은 많은 해석을 낳게 했다.

양동교회, 제중원을 비롯한 향토사 연구자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신문이 전파됐다는 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가 쉽게 대하지 못했던 점을 활용해 만세 운동을 조용히 지원한 것으로 분석됐다. 한편으로는 신문과 독립선언문 전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초를 당해야 했던 상황 때문에 이것들을 은밀한 장소에 숨겨야만 했던 비운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하는 매개가 됐다.

신문은 4호까지 발행됐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신문은 1호가 유일하다. 신문을 만든 장호조와 홍덕주는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지만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린 황상호는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전파 과정과 역할, 가치 재조명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목포=김용희 기자 kimy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