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가 열리던 초기, 포르투갈에 선수를 뺏긴 에스파냐 왕실은 초조했다. 바로 그때 구세주처럼 그들 앞에 나타난 인물은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콜럼버스는 금과 향신료가 넘치는 인도를 포르투갈에 앞서 에스파냐에게 바치겠노라며 엄청난 후원과 이권을 요구했다.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은 고심 끝에 콜럼버스의 제안을 수락하고 후원자가 되어 주기로 한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보니 후원을 한 쪽도, 후원을 받은 쪽도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리스본을 출발한 콜럼버스는 기존의 항로대로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리는 대신 계속해서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불과 70여 일 만인 1492년 10월 12일 새로운 대륙에 닿았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땅은 인도가 아니었고 금과 후추 대신 그의 배에 실린 것은 감자와 고추였다. 콜럼버스는 고추를 붉은 후추라는 뜻에서 ‘레드 페퍼’(Red pepper)로 불렀고 자신의 ‘항해 일지’에 ‘후추보다 더 좋은 향신료’라고 적었다. 확증 편향에 가까운 콜럼버스의 착각은 400여 년이 흐른 뒤 한반도의 식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원전 8000~7000년경부터 페루 산악 지대에서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추는 어쨌거나 콜럼버스 덕분에 세계 시장에 데뷔를 하게 되는데, 유럽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후추에 비해 맵고 향이 적은 데다 가공(분쇄)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추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다시 긴 항해를 시작한다. 아프리카, 인도, 필리핀, 중국 남부 해안, 마카오를 거쳐 일본 규슈 등지로 전파된다. 1543년 일본에 전파된 고추는 부산에 있던 왜관을 통해 급기야 한반도에까지 들어오게 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 발견한 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후였다.
남미가 원산지인 고추는 한반도에서도 잘 자랐다. 하지만 특유의 매운맛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일본이 조선인을 독살할 목적으로 가져온 독초로 취급했다. 1614년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남만초(고추)에는 강한 독이 있는데, 왜국(일본)에서 처음 들어왔다. 그래서 왜개자라는 속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식물을 심어 키우는 주막에서 그 강렬한 맛을 이용하여 소주에 넣어 팔기도 하는데, 이것을 마시고 죽은 자도 있다.”
음식이나 식재료가 전래되는 과정과 대중화되는 과정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전래는 어떤 목적과 사건에 의해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반면 대중의 선택과 수용은 매우 더디게 진행된다. 이를 단축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독초로 취급받던 고추가 한반도에 온전히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김치를 만나면서부터다.
삼국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김치의 원형은 채소를 오래 두고 먹기 위한 단순한 소금 절임이었다. 이후 발효를 통해 감칠맛이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발효를 발견한 이후로 마늘, 생강, 산초, 파 등의 향신료가 더해졌으나 고추만큼 극적이지 않았다. 고추의 매운맛이 젓갈의 부패를 막고 잡냄새를 제거하는 역할을 했다. 더불어 붉은색까지 더해져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통배추 김치가 탄생하게 된다.
김치와 더불어 고추가 대중화된 계기는 고추장을 만들면서부터다. 된장과 간장 같은 장류는 중국과 일본에도 흔하지만 고춧가루를 이용한 고추장은 우리만의 독특한 발효 음식이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영조(1724~1776년 재위)의 수라상에는 고추장이 올랐고, 이후 영조는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1816년에 편찬된 ‘농가월령가’ 3월령에는 ‘인간의 요긴한 일 장 담그는 일이로다. 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 고추장 두부장도 맛맛으로 갖춰 하소“라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고추장의 맵고 달짝지근한 감칠맛은 채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임금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살던 모든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김치와 결합되고 고추장을 담기 시작하면서 고추는 한반도의 밥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그 위세가 지나쳐 사뭇 걱정스러운 지경이다. 대중음식점의 상차림이나 반찬 가게의 진열장을 보면 온통 붉은색 일색이다. 고춧가루 특유의 칼칼한 매운맛 대신 캡사이신의 통각에 중독된 대중의 감각은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있다.
덕분에 한국인의 고추 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고추는 채소류 가운데 우리 농가 소득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하는 작물이 되었다. 유럽인들에게 신세계를 소개한 콜럼버스조차도 이러한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맛 칼럼니스트>
국가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보니 후원을 한 쪽도, 후원을 받은 쪽도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리스본을 출발한 콜럼버스는 기존의 항로대로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리는 대신 계속해서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불과 70여 일 만인 1492년 10월 12일 새로운 대륙에 닿았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땅은 인도가 아니었고 금과 후추 대신 그의 배에 실린 것은 감자와 고추였다. 콜럼버스는 고추를 붉은 후추라는 뜻에서 ‘레드 페퍼’(Red pepper)로 불렀고 자신의 ‘항해 일지’에 ‘후추보다 더 좋은 향신료’라고 적었다. 확증 편향에 가까운 콜럼버스의 착각은 400여 년이 흐른 뒤 한반도의 식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음식이나 식재료가 전래되는 과정과 대중화되는 과정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전래는 어떤 목적과 사건에 의해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반면 대중의 선택과 수용은 매우 더디게 진행된다. 이를 단축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독초로 취급받던 고추가 한반도에 온전히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김치를 만나면서부터다.
삼국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김치의 원형은 채소를 오래 두고 먹기 위한 단순한 소금 절임이었다. 이후 발효를 통해 감칠맛이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발효를 발견한 이후로 마늘, 생강, 산초, 파 등의 향신료가 더해졌으나 고추만큼 극적이지 않았다. 고추의 매운맛이 젓갈의 부패를 막고 잡냄새를 제거하는 역할을 했다. 더불어 붉은색까지 더해져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통배추 김치가 탄생하게 된다.
김치와 더불어 고추가 대중화된 계기는 고추장을 만들면서부터다. 된장과 간장 같은 장류는 중국과 일본에도 흔하지만 고춧가루를 이용한 고추장은 우리만의 독특한 발효 음식이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영조(1724~1776년 재위)의 수라상에는 고추장이 올랐고, 이후 영조는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1816년에 편찬된 ‘농가월령가’ 3월령에는 ‘인간의 요긴한 일 장 담그는 일이로다. 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 고추장 두부장도 맛맛으로 갖춰 하소“라는 대목이 나온다. 결국 고추장의 맵고 달짝지근한 감칠맛은 채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임금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살던 모든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김치와 결합되고 고추장을 담기 시작하면서 고추는 한반도의 밥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그 위세가 지나쳐 사뭇 걱정스러운 지경이다. 대중음식점의 상차림이나 반찬 가게의 진열장을 보면 온통 붉은색 일색이다. 고춧가루 특유의 칼칼한 매운맛 대신 캡사이신의 통각에 중독된 대중의 감각은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있다.
덕분에 한국인의 고추 소비량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고추는 채소류 가운데 우리 농가 소득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하는 작물이 되었다. 유럽인들에게 신세계를 소개한 콜럼버스조차도 이러한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맛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