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相生)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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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가난한 바보가 욕심쟁이 부자와 이웃해 살고 있었다. 바보는 매일 돌멩이를 주워 마당에 쌓아 놓았는데, 부자가 지나다 보니 맨 꼭대기에 금덩이가 놓여 있었다. 부자가 꾀를 내어 자기 집의 노적가리와 돌무더기를 통으로 바꾸기로 약속하고선, 아까운 마음에 맨 꼭대기 한 단을 내려놓고 넘겨주었다. 돌 더미를 받고 보니 금덩이가 보이지 않아 바보에게 물으니, 자기도 맨 윗돌 하나를 뺐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부(富)’에 대한 선인들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민담(民譚)이다. 부자는 큰 손해를 보고 바보는 잘 살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연찮은 행운에 의해 부자가 되는 이야기는 구전되는 치부(致富) 설화의 특성이지만, 한편으로 이 이야기는 눈치코치를 보며 약빠르게 행동하고 약자에 대한 갑질이 횡행하는 요즘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Allegory)로 다가온다.
작년에 공관병에 대한 육군 대장 사모님의 갑질이 회자되더니, 수년 전 땅콩 회항의 후속편으로 물벼락 갑질이 세간에 화제다. 오죽하면 외국에까지 소문나서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어 ‘갑질(gapjil)’에 대해 ‘중세시대 영주처럼 부하 직원이나 하도급 업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설명하였을까.
하지만 이것만일까. 대기업과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 콜센터 상담원 등 감정 노동자에 대한 갑질도 예외가 아니다. 일부 병원 간호사의 ‘태움’ 문화도 직업에 대한 헌신적 책무 요구와 후배를 위한 교육적 지도로 포장된 갑질이며, ‘미투’ 운동도 상대적 약자의 인권을 유린하고 육체·정신적 피해를 입히는 문화를 고발한다는 점에서 갑질 문화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에 있다. 생활 주변에서도 아파트 경비실 에어컨 설치 반대, 최저임금 상승을 빌미로 한 경비원 해고에 이어 아파트 단지 택배 차량 진입 금지가 최근 이슈화되었다.
외국인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모습은 빠른 인터넷, 당일 총알 배송, 기술 선도 기업, 감기도 치료해 주는 건강보험 등 빠른 속도와 대기업, 공공 서비스로 비춰진다고 한다. 올해 우리나라는 ‘30-50 클럽(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일곱 번째 멤버를 예약하며 선진국으로서의 외양을 거의 갖추었다. 그런데 사회·문화적 성숙도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여전히 이익 집단의 기득권 논리에 갇히고, 특권 의식 속에서 수신(修身)도 못하는 모리배들의 행동을 용인하는 사회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물론 최근 들어 갑질 문화가 부각된 것은 이에 대한 반성적 노력이 수반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면 아래에 있던 권력 불평등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가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가해자인 갑을 용납하는 세상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소수의 용감한 목소리, 침묵을 깨뜨리는 용기 있는 촉발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특정인에 대한 일회성 비판을 넘어서서 나 자신부터 조직 권력에 기대어 관행이라는 핑계로 갑질을 용인하거나 저지르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더불어 갑을 관계는 상대적이다. 우리네 범인(凡人)들에게 재벌은 범접하기 어려운 갑이지만, 촛불혁명으로 무너진 권력 앞에 비굴했던 재벌의 행태는 진부한 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을이라고 자위하는 우리 모습이 혹시 다른 누구에게 갑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봉건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선현들도 대학(大學)에 나오는 혈구지도(?矩之道 )를 강조하였으니, 자신의 잣대로 타인의 마음을 재고 나의 심정으로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라 하였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뜻이다.
구례 운조루의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간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진 큰 쌀뒤주가 있다.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니,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적선과 기부를 통해 이웃과 함께 하고자 했던 집주인의 모습을 민담 속의 부자와 대비해 본다. 이웃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너와 내가 같이 살자는 상생(相生)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패망의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년에 공관병에 대한 육군 대장 사모님의 갑질이 회자되더니, 수년 전 땅콩 회항의 후속편으로 물벼락 갑질이 세간에 화제다. 오죽하면 외국에까지 소문나서 미국 뉴욕타임스가 한국어 ‘갑질(gapjil)’에 대해 ‘중세시대 영주처럼 부하 직원이나 하도급 업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설명하였을까.
외국인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모습은 빠른 인터넷, 당일 총알 배송, 기술 선도 기업, 감기도 치료해 주는 건강보험 등 빠른 속도와 대기업, 공공 서비스로 비춰진다고 한다. 올해 우리나라는 ‘30-50 클럽(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일곱 번째 멤버를 예약하며 선진국으로서의 외양을 거의 갖추었다. 그런데 사회·문화적 성숙도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여전히 이익 집단의 기득권 논리에 갇히고, 특권 의식 속에서 수신(修身)도 못하는 모리배들의 행동을 용인하는 사회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물론 최근 들어 갑질 문화가 부각된 것은 이에 대한 반성적 노력이 수반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면 아래에 있던 권력 불평등에 대한 자성적 목소리가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가해자인 갑을 용납하는 세상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소수의 용감한 목소리, 침묵을 깨뜨리는 용기 있는 촉발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특정인에 대한 일회성 비판을 넘어서서 나 자신부터 조직 권력에 기대어 관행이라는 핑계로 갑질을 용인하거나 저지르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더불어 갑을 관계는 상대적이다. 우리네 범인(凡人)들에게 재벌은 범접하기 어려운 갑이지만, 촛불혁명으로 무너진 권력 앞에 비굴했던 재벌의 행태는 진부한 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를 을이라고 자위하는 우리 모습이 혹시 다른 누구에게 갑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봉건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선현들도 대학(大學)에 나오는 혈구지도(?矩之道 )를 강조하였으니, 자신의 잣대로 타인의 마음을 재고 나의 심정으로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라 하였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뜻이다.
구례 운조루의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간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진 큰 쌀뒤주가 있다.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이니,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적선과 기부를 통해 이웃과 함께 하고자 했던 집주인의 모습을 민담 속의 부자와 대비해 본다. 이웃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너와 내가 같이 살자는 상생(相生)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패망의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