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 지난 나른한 오후, 할아버지 한 분이 사무실을 찾았다. 꼭 변호사님이 상담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상담 테이블에서 차분히 사연을 들어 봤다.

할아버지는 노년에 낙향해 여유있는 시골 생활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경매로 비교적 낮은 가격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집과 토지를 소유했다. 본래 있던 집이 너무 낡고 오래돼 살기에 불편한 탓에 허물고 새로 집도 짓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분쟁이 발생했다. 옆집과 경계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새로 집을 짓기 위해 측량한 결과 본래 있었던 할아버지 소유 건축물이 옆집 토지 경계를 침범해 지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십 년 동안 그 자리에 있던 집이 옆집 토지 경계를 침범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았을 리 없다. 더구나 정당한 대가를 주고 구입한 토지가 사실상 일부는 본래 타인의 소유였다는 것이 할아버지를 혼란스럽게 했다.

옆집 주인은 응당 토지 측량 경계대로 그 땅을 이용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할아버지는 경매로 정당하게 구매한 땅이고 본래 수십 년간 집이 있었던 자리니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취득한 것 아니냐고 맞섰다.

분쟁을 의식해서 새로 지을 집의 위치는 경계 부분에 두지 않았지만, 이내 건축 과정에서 옆집 주인은 관계 행정청에 이런저런 민원을 넣어 할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절히 가격을 쳐 주겠다는 할아버지의 제안도 거절됐다.

이쯤 이야기를 들으면 변호사는 적절한 법적 해결책을 제시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법적 해결책이란 것이 정말 이 할아버지를 돕는 해결책일까? 법적으로 해결 하자면 분쟁은 심화하고, 그 결과를 보는 과정이 적지 않게 고달프며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시골 마을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평판은 또 어떻게 될까. 옆집 주인과 노후를 계속 함께해야 할 것인데 하루하루 서로 얼굴을 어찌 볼 것인가. 건축 과정에서 옆집 주인은 계속해서 ‘딴지’를 걸지도 모르고, 건축이 지연돼 발생하는 손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결국, 할아버지가 생각하던 여유 있는 노년의 시골 생활은 분노와 원망이 점철된 투쟁의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고, 어쩌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옆집 주인을 욕하며 생을 마감할지도 모를 일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언젠가부터 매우 힘들고 어렵다. 그럼에도 사회와 정치는 개인 또는 이익 집단의 이익을 극명히 주장하고 서로 투쟁해야지만 합리적인 이해와 조정이 이뤄지는 것처럼 설명하고 그것이 민주주의인 양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분법적인 판단 기준이 만연한 세상이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의 말과 행동에서 오히려 편협하거나 극단적인 사고 방식과 세상살이 기술, 정치 기술을 발견할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혹자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핀잔을 할지도 모르겠다. 정치에 있어서는 51% 정치 이론에 따라 49%를 잡으려다 잡은 줄 알고 있었던 51%도 놓치는 경우도 있으니, 결국 자신의 노선이 어딘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처신을 할 것인지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생각에 허점이 있다거나 반대되는 생각에 타당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장을 수정하지 않고 목소리나 표현 수위를 높이는 건 눈 한 번 질끈 감았다는 것이 아닐까.

양심에, 그리고 균형 감각에 한 번 무뎌지면 그 다음은 쉽다. 모든 중독이 그런 것처럼.

할아버지에게 그동안의 다툼에 대해 옆집 주인과 마음을 내놓고 이야기해 보실 것을 권했다. 어느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노년이 평안하고 아름답기 위해서는 그러셔야 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타협이 되지 않으면 그때는 직접 도와드리겠노라 말씀드렸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맞는 말을 들었다’는 듯 온화하게 누그러졌고, 상담료까지 지급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할아버지와 옆집 주인이 마음 따뜻한 겨울을 보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