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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찬석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정사목] 라쇼몽(羅生門) 효과
2017년 10월 13일(금) 00:00
요즈음 뉴스를 접할 때 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가 적폐(積弊)이다. 그런데 이 적폐라는 단어는 단독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적폐 세력이나 적폐 청산을 이야기 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적폐 세력이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폐단의 무리나 세력으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부정부패와 비리를 자행하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취한 무리이기에 당연히 청산을 해야 한다. 이를 적폐 청산이라 한다.

대한민국의 초대 국회였던 제헌 국회에서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1948년에 공포된 ‘반민족 행위 처벌법’과 같은 해에 설치된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같은 적폐 청산 시도가 있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자주적인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일제강점기 동안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친일파의 청산이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적폐 세력인 친일파들은 미군정(美軍政)의 친일파 보호 정책으로 사회 각 분야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민특위는 정부 수립을 앞두고 해방에 기여한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무너진 민족정기와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설치 목적에 따라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 세력의 비협조와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친일 세력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나아가 이들이 한국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적폐 청산의 실패로 인해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가치관 혼란에 빠졌으며, 사회에 이기주의와 부정부패 등이 횡행하는 토대를 제공하게 되었다. 사실 적폐 세력에게 적폐 청산은 자신들의 생존이 달려 있기 때문에, 반발이 심할 수 밖에 없다.

작년 국정 농단 사태를 통해 시작된 촛불 정국에서는 다시 적폐 청산이 커다란 화두로 떠올랐고, 이러한 국민의 염원으로 새롭게 출범한 현 정부의 적폐 청산 행보에 대해서 더욱 속도를 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정치 보복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나의 행동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똑같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너무나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는데,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1950년에 찍은 ‘라쇼몽’(羅生門)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부부가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나 남편은 살해당하고 아내는 겁탈당한, 어찌보면 사실관계가 아주 단순한 살인 사건과 강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도적의 입장에서, 아내의 입장에서, 무당의 입을 통해서 죽은 남편의 입장에서, 그리고 숨어서 사건을 지켜본 나무꾼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여 동일한 사건에 대해 너무나 상반된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같은 사실이라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 각자 다른 입장으로 해석하면서 본질 자체를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어떻게 해서라도 나의 과실은 줄이고 남의 잘못을 크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이기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기억마저 스스로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라쇼몽 효과에 따른 증상이 심한 사람들이 어떤 사회나 공동체의 지도자나 책임자가 된다면 그는 책임은 지지 않고, 만약 어떠한 문제가 터져 책임을 질 일이 생기면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을 찾게 된다. 결국 실패의 책임은 서로에게 떠넘기며, 공은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라쇼몽 효과에 따른 현상을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완전하게 극복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는 이기심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을 위해서는 개인의 이기심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같은 기억을 공유하면서 공감할 수 있을 때, 라쇼몽 효과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