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시간속을 걷다] <12> 1968년 일신 떡방앗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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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시간속을 걷다] <12> 1968년 일신 떡방앗간
타닥타닥 나무 장작에 깨 볶는 소리 … 세월 익는 내음
2017년 08월 03일(목) 00:00
50년째 곡성군 고달면에서 ‘일신 떡방앗간’을 운영하는 정춘섭·하금례 부부.
시골 방앗간 앞에 엷은 하늘색 자전거 두 대가 보인다. 뒷쪽엔 짐을 실을 수 있는 작은 리어카가 달려 있다. 자전거를 몰고 온 이는 마을에 사는 장옥자(74) 할머니와 나성환(84) 할머니다. 직접 키운 참깨와 들깨를 리어카에 싣고 기름을 짜기 위해 방앗간을 찾았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마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한켠에선 한창 기름을 짜는 중이다. 안주인 하금례 할머니가 막 볶은 땅콩부터 입에 넣어준다. 깨와 함께 볶은 땅콩은 고소하다.

곡성군 고달면 고달농협 앞에 자리한 일신 떡방앗간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개량 기와로 지붕을 얹기는 했지만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떡방앗간’이라고 벽에 프린트된 검은 글씨가 옛 모습 그대로다.





정춘섭(81) 하금례(76) 부부가 운영하는 일신떡방앗간은 지난 1968년 문을 열었다. 명절이나 생일이면 빠지지 않던 떡을 만들고, 고추를 빻고, 기름도 짜주던 곳이다. 지금은 주로 기름을 짜는 일을 하지만 즐비한 기계들을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방앗간의 일상이 그려졌다.

기름 짜는 모습을 실제로 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할아버지네 방앗간에서는 나무로 불을 때 깨를 볶는다. 방앗간 앞에 온갖 나무가 쌓여있다 했더니 깨를 볶을 때 쓰는 것들이었다. 땔감으로는 소나무가 가장 좋은데, 구입해 쓰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 못쓰는 나무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깨를 볶을 때 여러가지 연료를 이용했었다. 연탄도 써보고, 가스도 써봤지만 나무로 볶을 때가 가장 고소했다.

“이 집에서 짠 참기름이 진짜 꼬숩제. 저렇게 나무로 불 때서 해주니 꼬숩제. 가스로 하면 저런 맛이 안나. 이 집에서 철마다 떡도 해가고, 고추도 뽀사가고, 기름도 짜 가고 우리 집 살림에 많은 도움을 줬제.”

장 할머니 칭찬이 이어졌다.

방앗간 입구에선 정씨네 부부와 세월을 같이 했을 낡은 무쇠통에서 톡톡 깨가 볶아지는 중이다. 동네 사람들이 참깨를 들고 오면 물에 씻은 후 물기를 뺀다. 물기가 빠지면 통에 넣고 나무로 불을 때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참을 볶는데, 이게 기술이다. 나무 양으로 불의 강도를 맞추고 쇠꼬챙이로 불길을 조절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너무 센불도, 약한 불도 안된다. 타지 않으면서 적정하게 볶아내는 데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몸에 익은’ 노하우다. 부부는 번갈아 가며 불을 관리하고 깨를 볶는다.

다 볶아진 깨는 불냄새를 빼내는 과정을 거친다. 자동 기계에 여러 차례 나눠서 흘려보내며 불 냄새를 제거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기름에서 불 냄새가 심하게 나 맛이 없다고 한다. 이번엔 둥근 원형 통에 얇은 습자지를 두른 후 볶은 깨를 넣고 기계를 작동해 기름을 짜기 시작한다. 1㎠를 600㎏으로 누르는 엄청난 압력이다.

작은 구멍으로 기름이 졸졸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깔때기를 이용해 다 짜진 기름을 페트병에 담는 장 할머니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하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정성스레 담은 후 맛을 보라 하신다. 고소함이 입안에 확 퍼졌다.

신기한 건 기름을 짠 후 나온 원반 모양의 깻묵 덩어리였다. 꼭 톱밥을 뭉쳐 놓은 것 같은 모습에, 아직도 고소한 냄새가 남아 있다. 방앗간을 둘러 보니 한 켠에 깻묵 덩어리가 쌓여 있다. 전주와 광주에서 업자들이 퇴비와 사료 등으로 쓰기 위해 정기적으로 사간다고 한다. 가격은 ㎏ 당 200원 수준이다.

곡성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던 정 할아버지는 남원에서 고향 사람이 방앗간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앗간을 열었다. 가게 이름 ‘일신’은 ‘대학’의 한 구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에서 따왔다.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의미가 좋아서였다. 날마나 새로운 마음으로 일하자 싶었고 50년 세월 동안 지켜온 마음가짐이다.

한 때 떡방앗간 기계는 쉴새 없이 돌아갔다. 여름에는 설기떡이 인기요, 겨울에는 절편과 인절미를 만들었다. 꿀떡, 달떡도 인기 아이템이었다. 동네 주민들은 고추, 쌀, 깨 등을 머리에 이고 길게 줄을 섰다. 3∼4㎞를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한 때는 1㎞ 반경에 방앗간이 4곳이나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다. 기계를 최신식으로 들여놓고 젊은 나이었기에 열심히 일했다. 지금은 정씨네 방앗간만 남았다. 시대가 바뀌면서 떡을 방앗간에서 해 먹는 풍경이 사라진 탓이다.

“구정이나 추석 때면 잠도 못자고, 식사도 제 때 못하고 떡을 만들었제. 동네 사람들 줄 서 있고. 한데 시대가 바뀌어서 떡을 해가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제. 한해 한해 피부로 느낄 정도였어. 집안 제사들도 다 합쳐 간단하게 지내지 더 수요가 줄어들었제.”

방앗간의 가장 큰 일인 기름 짜기는 참깨와 들깨 한되 당 3000원씩 받는다. 참깨를 수확하는 것도, 기름을 짜는 것도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참깨하고 들깨 농사가 보통일이 아니여.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하잖아. 열심히 해도 손에 쥐어지는 건 진짜 작거든. 힘들고 고된 작업이제.”

장 할머니의 말에 정할아버지는 “깨는 열이 농사 지어서 혼자 먹고 수수는 혼자 농사 지어서 열이 먹는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이날 정 할머니는 직접 수확한 참깨·들깨 10되를 가져와 페트병 4개 분량의 기름을 짰다. 할머니가 땀과 정성으로 키워내고 일신방앗간 부부가 굵은 땀 흘리며 볶고 짜낸 기름은 도시에 사는 5남매에게 전해질 터였다.

정 할아버지 말처럼 “시골은 도시의 식량 보급창”이다. 온갖 농산물과 함께 부모님의 사랑도 함께 건네진다.

하 할머니가 몸이 아픈데다 일감도 그리 많지 않아 몇년 전 할아버지가 방앗간을 팔려고 내놓은 적이 있었다. 이 때 자식들이 만류했다.

“애들 말이 계속 일을 하다 안하면 아버지 아프실 거라고, 편하게 소일거리로 하시라고 하더라고. 하루에 손님 한 명 오면 한 명 받고, 두 명 오면 두 명 받고 없으면 또 말고. 아들 말이 딱 맞더라고. 우리 동네에서 자식들 다 대학 보낸 집이 우리집하고 두 곳 뿐이었어. 옛날에는 돈 벌려고 했지만 요즘은 세월 보내려고 하제.”

방앗간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사랑방이었다. 기름이 짜지는 동안 손님들은 외지로 떠난 자식들 이야기, 옛날 이야기, 젊었을 적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방앗간에 온 김에 참기름을 구입하려 할머니들에게 부탁을 드렸더니 자식들 몫이라며 절대 안된다 하신다.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주인 할머니가 며칠 전 짜놓은 기름을 소주병에 담아 내주셨다. 선물로 주는 거라 극구 우기셔서 음료수 한 박스 선물하고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었다. 기념으로 기름 한병씩 들고 사진도 찍었다. 곡성 춘섭씨네 방앗간에선 오늘도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난다.

/글·사진=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곡성=김계중기자 kj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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