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로 근무하던 시절 독일에 파견되어 통일과정을 공부하고 온 적이 있다. 가족들과 함께 갔으므로 부득이 중고 자동차를 구입하여 타고 다녔다. 중고차였지만 독일에서 생산된 차라서 성능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주말이면 가족들을 태우고 아우토반(Autobahn)을 달려 이웃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독일의 아우토반은 속도제한이 없는 고속도로이다. 자동차의 성능에 따라 속도제한 없이 달려도 딱지를 끊을 염려가 없어서 좋았다. 가속페달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질주해 본 적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전 가족을 태우고 저지른 무모함에 자책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처럼 아우토반을 고속으로 질주하는 나의 자동차를 앞지르는 슈퍼카들이 종종 있었다. 백미러에 비치는 작은 물체가 순식간 따라붙어 상향등을 깜박이며 비키라는 신호를 보내오곤 했다. 외국이라 보복운전을 당하지 않을까 무서워서 비켜주기는 하였지만 그럴 때면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런 나의 경험을 들은 유학생이 나의 무례함을 깨우쳐 주었다. 독일의 아우토반에서는 자기 자동차보다 빠른 자동차가 뒤따라오면 얼른 비켜주는 것이 예의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빠른 차는 비싸고, 비싼 차를 타는 사람은 부자이며, 부자는 세금을 많이 내므로 얼른 진로를 양보를 해서 예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 유학생의 부연설명을 듣고나서 나의 무례함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독일을 비롯한 기독교 문명권에 속한 나라들은 십일조를 내야하는 교회법을 배경으로 세금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비용이라는 의식이 철저하게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탈세는 십계명의 하나인 위증죄와 함께 공동체를 해치는 중대범죄로 취급되어 실형선고가 관행이라고 한다. 그 결과 부자들은 많은 세금을 내고, 그만큼 공동체에 크게 기여하니 진로를 양보하여 예우를 해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세금을 많이 내서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부자들에 대한 존경과 예우는 크지 않은 것 같다. 고속도로에서 고급차는 쉽사리 양보를 받지 못한다. 다른 이유도 많이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우리나라 부자들이 독일의 부자들처럼 세금을 많이 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의 총수가 뇌물공여죄 등으로 구속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다른 재벌의 총수들도 연달아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 부정한 대통령이 재단기금의 출연을 요구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경쟁적으로 거액을 가져다 바치고 은근슬쩍 그보다 몇 배가 넘는 반대급부를 챙겨온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부자들이다. 부자들은 세금은 아끼면서도 뇌물은 아끼지 않고 바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고속도로에서 뒤따라온 슈퍼카가 경적을 울려도 흔쾌히 진로를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가진 재벌의 일가족이 함께 재판을 받았다. 아버지와 자식들 그리고 사실혼 배우자가 순차적으로 형사법정 앞 포토라인을 밟았다. 재벌일가의 숨겨진 범죄들이 총수자리를 승계하려는 형제의 난으로 그 일각을 드러낸 것이다. 재벌의 총수는 재판정에서 일본말을 해대고, 그를 승계한 후계자는 어눌한 우리말로 사과의 뜻을 밝혔다.

축첩제도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재벌의 총수는 그가 후원한 미인대회로 선발한 37년 연하의 미인을 사실혼 배우자로 삼았다. 그날의 형사법정은 우리나라 재벌가의 도덕적 민낯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슈퍼카를 타는 부자들에게 고속도로의 앞길을 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겠는가?

굳이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서양의 격언을 빌리지 않더라도 경주의 최부자집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가훈을 지켜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자들이 그 재산의 크기에 비례하는 존경과 예우를 받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도 고급차가 뒤따라오면 기분좋게 양보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