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하늘 사이로 보슬보슬, 참 예쁘게도 눈이 내리던 날. 그날의 소주 안주는 동태탕이었다. 며칠 전 광주에 눈이 내렸고, 자연스레 시커먼(?) 청년들이 모였다. 간단히 한 잔 하자던 약속은 늘 그렇듯 소주 한 병이 넘어갈 때 즈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없었던 일이 됐다. 동태탕은 고춧가루로 맛을 낸 생태탕과 다르게 고추장과 된장이 들어간다. 시원하고 얼큰한 생태탕에 비해 약간 텁텁함과 냉동생선 특유의 비릿함도 느껴진다. 그 뒷맛을 잡아주는 게 바로 소주 한 잔이다.

수년 전 겨울, 강원도 산골짜기 친척집에 잠시 머물게 됐던 나는 동태탕을 즐겨 먹었다. 흔한 슈퍼마켓도 없었던 작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냉동실(사실 겨울철 냉동실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춥다)에 얼려두고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게 동태였다.

동태(凍太)는 말 그대로 얼린 명태를 뜻한다. 이 명태란 놈은 얼리면 ‘동태’가 되고, 바람에 바싹 말리면 ‘북어’가 되고, 반건조를 시키면 ‘코다리’가 된다.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 덕장에서는 명태를 걸어둔 채 일부러 겨울 눈을 맞춰가며 얼렸다가 녹였다를 수차례 반복해가며 햇빛에 말리는데, 이게 노란 빛깔의 ‘황태’다. 참 이상하게도 명태를 그냥 내버려둬도 명태가 아닌 ‘생태’(生太·얼리거나 말리지 않고 잡은 그대로의 명태)라 불린다. 이름이 참 많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이름을 가진 명태란 생선은 애초에 이름조차 없었던 무명(無名)의 생선이었다고 한다. 동해 북쪽 바다에서 차고 넘치게 잡혔던 명태는 예부터 다양한 형태로 즐겨먹던 생선이다. 조선 인조 때쯤 부임한 함경도 관찰사가 명천군(明川郡) 초도순시를 나갔을 때 동네에서 반찬으로 내온 생선이 있었다. 담백하고 맛이 좋아 이름을 물었더니 명천에 사는 태(太)씨 성을 가진 어부가 처음 잡아온 물고기라 하여 명태(明太)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말이 있다.

고려시대 강원도에서는 명태를 북방 바다에서 온 고기란 뜻의 북어(北魚)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정식 이름은 아니었다. ‘동태나 북어나’(이것이나 저것이나 매한가지다)라는 속담도 여기에서 나온 것 같다. 아무튼, 정식 기록에 ‘명태’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효종 3년 때 ‘승정원일기’에서라고 한다. 무명(無名)의 물고기라 먹으면 안 된다는 미신 때문에 잡지도, 먹지도 않았다는 말도 있다. 늘 가까이에 있으면서 온갖 형태로 즐겨먹던 명태,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면서도 배고픈 서민들의 유용한 먹을거리가 되어준 고마운 물고기다.

명태도 자신이 태어났을 때 이렇게 수많은 이름을 가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똑같은 바다를 헤엄치면서도 운이 나빠 누군가에게 잡힐 수도 있고, 누구에게 잡히느냐에 따라 동태가 될지, 생태가 될지, 코다리가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게 명태의 ‘안쓰러운’ 삶이다.

살다 보면 간혹 내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다. 그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가 그어 놓은 기준에 인생을 짜맞추면서 스스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 가진 직업에 따라, 보이는 것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남들의 시선 따위를 두려워할 것도, 그들의 기준에 따를 이유도 없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운명과 이름마저 좌지우지되는 명태와 다르지 않는가. 적어도 동태가 될 것인지, 황태가 될 것인지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