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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서석초등학교] 근대 공교육 탯자리 … 한국 교육사 거목으로 성장
2016년 07월 20일(수) 00:00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 “학교 다닐 땐 운동장이며 학교가 참 넓었던 거 같은데···. 어른이 돼 다시 와보니 아주 작네.” 서석초등학교에 들어섰을 때는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 졸업생은 아니지만, 어릴 적 자주 놀러 다니곤 했던 학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참 컸다.

광주·전남 지역 최초의 공립초등학교인 서석초는 지역 공교육 역사를 품고 있는 학교로 올해 딱 120살이 됐다. 서석초 뒤를 이어 일본인들이 주로 다녔던 중앙초(1907년), 수창초(1921년), 지산초(1923년), 광주동초(1926년), 효동초(1929년) 등이 문을 열었다.

학교에 들어서니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담고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눈에 띈다. 붉은 벽돌 건물들은 찬찬히 들여다 보면 축조 방식 등이 인상적이다. 울퉁불퉁 벽돌을 쌓아올린 모습이 독특하고 아치형 창문은 유럽의 건물을 떠올리게 한다. 문화재청은 지난 2002년 본관과 강당, 별관을 등록문화재 제17호로 지정했다.

서석초는 일제 강점기, 6·25, 4·19 등 대한민국 역사와 한국 교육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학교 이름이 7차례나 바뀌며 시대의 흐름을 보여준다. 서석초는 1896년 11월 6일 문을 연 전라남도 관찰부 공립소학교가 출발이다. 당시 을미개혁 일환으로 공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출석생수 40인 등의 요건을 갖추면 국고금 50원 이내를 지원해줬다. 1906년 공립광주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서석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단 건 1950년이다.

서석초가 현재 자리로 옮겨 온 건 지난 1927년이다. 처음엔 광주시 구동 향교 내 사마제(司馬薺)를 임시 교사로 사용하다 1907년 동문로 옛 광주일보 자리에 터를 잡았다. 개교 당시에는 3년제로 운영되다 1906년 4년제로 개편됐고, 지금과 같은 6년제가 시작된 건 1922년이다.

지난 1996년 서석초와 총동창회가 발간된 ‘광주 서석 100년사’(편찬위원장 최승호)에는 3·1운동과 관련,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19년 광주보통학교 4학년으로 급장이었던 17세 최영섭군이 4월 8일 오전 10시 자혜의원(현 전남대 부속병원) 앞에서 집합,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지만 3·1 만세운동은 여의치 못하고 최영섭군은 이후 계속 독립운동에 가담, 경찰의 고문과 실형을 받아 나이 33세에 꽃다운 인생을 마감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북한군이 광주에 주둔하면서 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간다. 당시 강용수 교장은 학적부와 졸업대장을 서류상자에 넣어 가마니로 포장, 학교 뜰에 파묻어 두었다가 북한군이 물러간 후 다시 꺼냈고, 11월 1일 다시 문을 열었다. 그해는 학교가 전남지구 전투사령부로 사용되면서 학생들은 인근 학교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책에는 졸업생들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1943년 입학해 39회 졸업생인 김양균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마분지를 만들기 위해 말똥을 주우러 다녔던 기억, 식량 공출 때문에 쌀밥이 귀해 학교에서 배급해 주는 ‘빵표’를 유용하게 썼던 이야기, 일본인 ‘아닷지’ 선생이 군대 소집영장을 받고 떠나자 광주역전에서 출정 환송 행사를 했던 기억들을 풀어놓았다.

교과목도 변화 과정을 거쳤다.1907년 일본어 과목이 신설됐고 1910∼21년에는 수신, 국어(일어), 조선어 및 한문, 산술 등을 필수로 공부했다.

조옥형 교장과 함께 본관 2층에 자리한 서석역사관에 들렀다. 초창기부터 쓰던 탁자, 책상, 난생 처음 본 스타일의 풍금 등이 눈길을 끈다. ‘땡땡’ 소리를 내던 학교종 대신 ‘딩동댕’ 음정을 내는 학교종도 인상적이다.

역사가 오래 되다 보니 학교를 찾는 이들이 많다. 얼마 전에도 졸업생들이 찾아와 기념 사진을 찍고 갔다. 역사관에 놓인 방명록엔 ‘옛 추억을 더듬으며 6학년 1반 교실에서-41회 졸업생’이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한장 한장 넘겨 본다. 현재 독일에서 살고 있는 이인석씨는 1954년∼60년까지 다녔던 학교를 추억하는 글을 남겼고, 1953년 졸업생으로 미국 메릴랜드에서 다녀간 이는 ‘세계 최고 나의 모교’라고 썼다.

교무실 옆 공간에 보관된 낡은 학적부는 학교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세월의 더께가 그대로 묻은 학적부는 조심해서 만지지 않으면 금방 바스라질 것같다. 1930년 학적부에는 수우미양가 대신 과목 별로 1점부터 10점까지 점수가 매겨져 있고 국어, 직업, 체조 등의 과목이 눈에 띈다. 개인 신상에 관한 자료도 빼곡하게 담겨 있다. 원본 일부는 정부기록물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다.

서석초는 올해 107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총 졸업생 수는 106회까지 5만2553명에 달한다. 초창기 50명으로 시작한 학생 수는 가장 많을 땐 7500명에 육박했다. 1970년대 산업화 영향을 받아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광주 지역 평준화가 진행되기 전에는 명문중학교 광주서중 진학생의 많은 수가 서석초 출신이었다.

하지만 도심공동화가 진행되면서 학생 수가 급감하기 시작한다. 현재 전교생 수는 173명, 교사는 21명이다. 전국대회 우승도 차지하는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서석초 야구부 인원이 전체의 15% 정도 된다. 다행히 2013년부터 여타 학교에 비해 감소율이 떨어진 상태다.

서석초 리플렛을 살펴보니 ‘머물고 싶은 도심 공원학교’라는 게 눈에 띈다. 정문 쪽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교목 히말라야시다는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문 쪽은 꼭 정원처럼 꾸며져 있다. 조금은 촌스러운 동물 모형과 팔각정, 각종 꽃나무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점심 식사 후 인근 회사원들이 커피 잔 하나 들고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새단장 한 학교숲 등도 ‘쉼’을 제공한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 일행에게 학교측에선 작은 기념품을 건네줬다. ‘이 기념품은 120년 전통을 찾는 졸업생과 내방객이 많아 기념과 홍보의 마음믈 담아 제작된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학교 역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고, 작지만 따뜻한 마음에 훈훈해진다. ‘아침해 돋아나는 무등산 아래/ 터전도 아름다운 우리 학교’로 시작되는 서석초 교가는 노산 이은상이 가사를 쓰고, 박태준이 곡을 붙여 1947년에 만들었다.

학교를 나오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졸업 후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나의 모교에도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 내 학적부도 한번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기사를 쓰는 지금,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모교의 교가도 인터넷에서 찾아 흥얼거려 본다.

/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