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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인 서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역사의 정의에 어긋난 위안부 합의
2016년 02월 03일(수) 00:00
지난 12월 28일 한일 양국은 외교장관회담을 개최하고 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인신매매되고 성노예로 인권을 유린당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최종합의안을 도출했다고 발표했다.

합의안에는 일본총리의 사과와 배상금 기금 조성이 포함됐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 당국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일본 외무상 기시다 후미오는 말했다. 또한 10억엔 정도의 예산으로 46명의 생존 위안부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으로 약속되었고, 한국은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정부와 함께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해 주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류는 다시는 국제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각국은 다시는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전쟁기간에 벌어진 전쟁범죄에 대해 가해자들이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하면서 국민과 미래세대에게 교육하였다.

독일은 전후에 초대 아데나워 수상부터 나치 피해자와 피해국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함으로써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었다. 1970년 12월 당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태인 희생자 추념비’를 방문했을 때 비가 내리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면서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다. 독일 정부는 정신적으로 진심으로 사죄하면서 물질적으로도 배상에 충실하였다. 1952년부터 현재까지 유대인에게는 600억 달러를, 소련에게는 150억 달러를, 폴란드에게는 13억 마르크를 배상하는 등 11개 국가에게 배상하였다. 독일은 민간 기업에서도 전시 강제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100억 마르크의 기금을 조성하여 165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배상하였다.

미국도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격 직후인 루스벨트대통령 시절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해, 약 11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로 수용했던 것에 대해, 1992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클린턴이 친필 사인한 사과 편지와 함께, 약 6만 명의 생존자에게 1인당 2만 달러씩 지급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배상하였다. 사망자는 유족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면서 모두 12억 5천만 달러를 지급했다.

캐나다도 1942년 일본계 캐나다인 강제 수용에 대해, 1988년 9월에 멀루니 수상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1인당 2만천 캐나다달러의 배상을 했고, 2012년 5월에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 정부도 연방 정부의 강제수용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에 대해 정식으로 사죄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인류는 다시는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전승국이든 전범국이던 간에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함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실천하였다.

이른바 위안부는 1932년∼1945년 사이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아시아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일본 정부가 계획하고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실행한 인신매매와 성노예 제도였다. 홀로코스트의 살인과 규모가 같은 정도로 잔학하고 폭력적이었다. 하루에 50여 차례나 강간을 당하였고 살아남은 위안부 여성도 전쟁 범죄를 숨기려는 일본 군인에 의해 종종 총살당하거나 수류탄으로 살상됐다. 전체적으로 성노예 여성들 4명 중 1명 만이 살아남았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노예무역 시기의 아프리카 노예 사망률보다도 높다. 인류 역사에 이보다 더 잔혹한 역사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민간업자가 저지른 짓이라고 부정하지만 산더미 같은 증거를 없앨 수는 없다.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부인하는 것은 또 다른 죄를 범하는 짓이다.

이번 한일 위안부 합의에는 군이 ‘관여된’이라는 모호한 진술만 있을 뿐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는 없다. 또 법적인 배상금 대신 기부금만 있다.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인 배상이 없는 합의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정부는 합의를 파기하고 재협상에 나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