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불지 않고 하오의 가을볕은 따사롭다. 한낮의 해미읍성은 고요하다. 성은 견고하고 정교하다. 단아함마저 묻어난다. 해미읍성을 조선의 3대 읍성(고창읍성, 순천 낙안읍성)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이유다.
서산은 서해로 삐죽이 불거진 지형만큼이나 바다와 가깝다. 내륙은 호리병처럼 좁고 긴 천수만을 거느린다. 이곳은 현대 창업자 고(故) 정주영 회장의 혜안이 기발한 상상력으로 현실화된 곳이다. 폐유조선 공법으로 바다를 막아 광활한 간척지를 개간했다.
그 서산의 남동쪽에 해미(海美)읍이 있다. 예로부터 풍부한 물산이 거래되고 한양으로 떠나는 세곡선이 이곳을 거쳤다. 당연히 왜구들의 출몰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영(營)을 두고 성을 쌓게 된 이유다.
그러나, 왜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그 성에서 살육의 참상이 있었다. 때는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인(1866)년, 대원군이 내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으로 고을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즈음이었다. 쇄국양이(鎖國洋夷). 대원군은 서양인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문호를 굳게 닫았다.
그 즈음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역 교인 수장인 이존창이 모친의 제사를 지내지 않기 위해 신위를 불태우는 일도 일어난다. 두 사건 모두 천주교인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은 일대 파란에 휩싸인다.
마침내 해미읍성의 옥문이 열렸다. 오랏줄에 묶인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줄레줄레 동헌(東軒) 앞으로 끌려나왔다. 실력자인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을 참형에 처했다. 그에게 천주를 믿는 교인들은 내치를 강화하고 외세를 배격할 근거가 되었다.
회화나무. 그곳에 천주교인들을 달았다. 해미읍성 중앙에, 동헌 앞에, 교인들은 줄줄이 매달렸다. 교인들은 반항하지 않았다. 한 떨기 꽃처럼, 빛나는 별처럼, 영롱한 새벽이슬처럼, 한줄기 바람처럼, 스러지는 안개처럼, 그들은 그렇게 산재물이 되었다.
그들에게 신앙은 생명이었다. 봉건의 관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극한 도였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염원으로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약하지만 비굴하지 않았고, 담대하지만 무모하지는 않았다. 이 역설의 힘은 진리다. 현상이 아닌 가치를 추구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이며, 그것의 기원은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이다.
“충청도 말로 회화나무를 호야나무라고 합니다. 회화나무는 공부하는 이가 그 그늘 아래 있으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합니다. 학자수라고 불리는 연유지요. 그런 맑고 고결한 나무에 산 사람을 매달아 극형에 처했으니…”
문화해설사 구영희 씨의 눈빛이 호야나무 가지 끝에 닿는다. 가늘게 떨리는 눈빛이 이편에서도 느껴진다. 해설할 때마다 그이는 매번 사슬의 흔적을 그려야 하나보다.
나희덕 시인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에서 회화나무를 이렇게 표현한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신실한 이들을 매달아야했던 그 나무.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힌 나무는 그날의 참극을 무언으로 방증한다. 그리하여 이 가없고 처연한 나무는 오래도록 살아 그 무참함을 감당한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살아서 그 가혹의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거다. 망각보다 무서운 것은 기억이며, 기억보다 더한 고통은 각인이다.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07)때 쌓기 시작해 성종 22년(1491)에 완성했다. 출입문은 정문인 진남루, 동문, 서문이 있고 2개의 포문이 있다. 전체적인 성벽 길이는 1.5킬로미터, 높이 5미터이며 성안의 면적은 2만평 정도 된다.
당초 해미읍성은 3중 방어 시스템으로 축조되었다. 성 주위로 탱자나무를 둘렀고 안으로 ‘해자’(垓字)라는 습지를 조성했다. 왜구들의 진입을 지연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성 자체만 두고 보면 해미읍성은 꽤나 품계가 높다. 소속 군졸만 대략 1500명에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상주했다. 13개 군현을 관할했으며 평시에는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문헌에 따르면 1579년 이순신도 이곳에서 열 달 가량을 근무한 것으로 나와 있다.
청허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해미읍성 북쪽에 아담한 정자다. 무리지어 피어난 코스모스가 가을의 향기를 뿜어낸다. 숨이 멎을 만큼 고운 향기다. 평시에는 선비들이 이곳에 들러 시를 읊었다.
병인년을 전후해 벌어졌던 참극의 장면이 흑백필름처럼 지나간다. 백성을 지키라고 쌓은 성에서, 대원군은 참형을 집행했다. 그에게 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위임했던가. 많은 이들이 죽어간 이곳에서 역사는 에누리가 없다는 사실을 되뇌인다. 그리하여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호야나무를 보면서, 오늘의 역사를 생각한다.
/글=박성천기자 skypark@·사진=박성배 사진가
서산은 서해로 삐죽이 불거진 지형만큼이나 바다와 가깝다. 내륙은 호리병처럼 좁고 긴 천수만을 거느린다. 이곳은 현대 창업자 고(故) 정주영 회장의 혜안이 기발한 상상력으로 현실화된 곳이다. 폐유조선 공법으로 바다를 막아 광활한 간척지를 개간했다.
그러나, 왜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그 성에서 살육의 참상이 있었다. 때는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병인(1866)년, 대원군이 내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으로 고을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즈음이었다. 쇄국양이(鎖國洋夷). 대원군은 서양인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문호를 굳게 닫았다.
그 즈음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역 교인 수장인 이존창이 모친의 제사를 지내지 않기 위해 신위를 불태우는 일도 일어난다. 두 사건 모두 천주교인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은 일대 파란에 휩싸인다.
회화나무. 그곳에 천주교인들을 달았다. 해미읍성 중앙에, 동헌 앞에, 교인들은 줄줄이 매달렸다. 교인들은 반항하지 않았다. 한 떨기 꽃처럼, 빛나는 별처럼, 영롱한 새벽이슬처럼, 한줄기 바람처럼, 스러지는 안개처럼, 그들은 그렇게 산재물이 되었다.
그들에게 신앙은 생명이었다. 봉건의 관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극한 도였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염원으로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약하지만 비굴하지 않았고, 담대하지만 무모하지는 않았다. 이 역설의 힘은 진리다. 현상이 아닌 가치를 추구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이며, 그것의 기원은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이다.
“충청도 말로 회화나무를 호야나무라고 합니다. 회화나무는 공부하는 이가 그 그늘 아래 있으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합니다. 학자수라고 불리는 연유지요. 그런 맑고 고결한 나무에 산 사람을 매달아 극형에 처했으니…”
문화해설사 구영희 씨의 눈빛이 호야나무 가지 끝에 닿는다. 가늘게 떨리는 눈빛이 이편에서도 느껴진다. 해설할 때마다 그이는 매번 사슬의 흔적을 그려야 하나보다.
나희덕 시인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에서 회화나무를 이렇게 표현한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신실한 이들을 매달아야했던 그 나무.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힌 나무는 그날의 참극을 무언으로 방증한다. 그리하여 이 가없고 처연한 나무는 오래도록 살아 그 무참함을 감당한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살아서 그 가혹의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거다. 망각보다 무서운 것은 기억이며, 기억보다 더한 고통은 각인이다.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07)때 쌓기 시작해 성종 22년(1491)에 완성했다. 출입문은 정문인 진남루, 동문, 서문이 있고 2개의 포문이 있다. 전체적인 성벽 길이는 1.5킬로미터, 높이 5미터이며 성안의 면적은 2만평 정도 된다.
당초 해미읍성은 3중 방어 시스템으로 축조되었다. 성 주위로 탱자나무를 둘렀고 안으로 ‘해자’(垓字)라는 습지를 조성했다. 왜구들의 진입을 지연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성 자체만 두고 보면 해미읍성은 꽤나 품계가 높다. 소속 군졸만 대략 1500명에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상주했다. 13개 군현을 관할했으며 평시에는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문헌에 따르면 1579년 이순신도 이곳에서 열 달 가량을 근무한 것으로 나와 있다.
청허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해미읍성 북쪽에 아담한 정자다. 무리지어 피어난 코스모스가 가을의 향기를 뿜어낸다. 숨이 멎을 만큼 고운 향기다. 평시에는 선비들이 이곳에 들러 시를 읊었다.
병인년을 전후해 벌어졌던 참극의 장면이 흑백필름처럼 지나간다. 백성을 지키라고 쌓은 성에서, 대원군은 참형을 집행했다. 그에게 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위임했던가. 많은 이들이 죽어간 이곳에서 역사는 에누리가 없다는 사실을 되뇌인다. 그리하여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호야나무를 보면서, 오늘의 역사를 생각한다.
/글=박성천기자 skypark@·사진=박성배 사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