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의 서슬 퍼런 탄압 아래 5·18의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1981년 늦가을, 광주시 북구 운암동 소설가 황석영씨 집 2층 구석방에 지역 연행(演行)예술운동패 회원들이 모였다. ‘빛의 결혼식’으로 이름 지어진 노래극 ‘넋풀이’ 제작을 위한 비밀 회합이었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산화한 고(故) 윤상원 열사와 1979년 노동현장에서 숨진 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이 테마였다.

노래극 마지막 부분에 들어갈 ‘부활의 노래’는 백기완씨의 시 ‘묏비나리’를 토대로 황씨가 각색한 노랫말에 1979년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으로 입상했던 전남대생 김종률씨가 밤샘 작업 끝에 곡을 붙였다.

이 노래는 밀폐된 방에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돼 은밀히 보급됐다. 이젠 민중가요를 넘어 대중가요로 애창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 순간이다.

오월 광주는 물론 노래운동사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차지하는 의미는 각별하다. 1980년대 초 주체할 수 없는 패배감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젖어 있던 광주시민들에게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호소는 한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자괴감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도록 승리의 의지를 북돋워준 것이다.

핏빛 구호 가득한 전투적 운동가요에서 벗어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는 가사와 서정성 가득한 단조풍의 가락도 진일보한 것이었다.

엄혹했던 5공 시절, 이 노래가 순식간에 대학가로 퍼져 각종 집회 때 ‘민중의례’에 사용되고, 6·10 항쟁 등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는 어김없이 불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2004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때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군악대 반주에 맞춰 끝까지 불러 화제가 됐다.

일부 동남아 국가에 번안돼 민중의 노래로 애창되기도 했다. ‘새날’을 갈망하는 노랫말은 이제 민주주의의 역사가 되었다.

지난 30여년 동안 5·18 기념행사에서 추모곡으로 불려온 ‘임을 위한 행진곡’이 퇴출 위기를 맞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올해 기념식을 앞두고 별도의 공식 추모곡을 제작하기 위해 4800만원의 예산을 편성한 것이 광주일보 취재 결과 확인된 것이다. 여기에는 국회의 부실한 예산 심사도 한몫했다. 민주당뿐 아니라 호남 의원들조차 면밀한 검토 없이 통과시켜 준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에서 배제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 해인 2008년 5·18 기념식에선 이 대통령이 참석, 유족과 함께 합창했지만 이듬해 갑자기 사라졌다. 여기에 정부의 ‘민중가요 의례 금지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2009년 말 국가보훈처가 5·18 공식기념노래를 국민 공모로 뽑는다고 발표했지만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이후 2010년에는 난데없는 ‘방아타령’이 대신하는 등 ‘임을 위한 행진곡’이 3년 연속 식순에서 배제되면서 보훈처와 5월 관련 단체가 기념식을 따로 치르며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국가보훈처가 5·18 공식 추모곡을 별도로 제정하려는 표면적인 이유는 3·1절, 8·15 등 정부 기념행사에는 기념노래가 있는데 5·18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가요는 불순하다’는 선입견에 광주정신과 5·18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임을 위한 행진곡’조차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분위기도 읽혀진다.

국가보훈처의 임무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을 섬기고 기념·추모행사를 통해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오월의 유산에 자긍심을 갖고 선양하는 것도 지당한 의무다.

다시 오월이다. 33주년을 맞는 올 5·18행사는 ‘33’이라는 숫자만큼 충만하게 해원상생(解寃相生)의 대동한마당으로 치러져야 한다. ‘다시 평화와 통일로’라는 슬로건이 그 의지를 반영한다. 정부는 ‘역사 지우기’를 의심케 하는 소모적인 시도를 즉각 중단하고, 올해 기념식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당당하게 울려퍼지도록 광주 시민에게 돌려줘야 마땅하다.

/정후식 정치부장·편집부국장 who@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