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국권을 빼앗긴 민족이 어떠한 수난과 비참함을 겪어야 하는지 우리는 지난 100년의 아픈 상처를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민족 고유의 우리말도 말살하고, 심지어 제 성씨에 이름까지 쓸 수 없었다. 민중들은 도탄에 빠진 것도 모자라 이역만리까지 끌려가 침략전쟁의 소모품 신세가 되어야 했다.

기껏 3000만 인구도 채 못 되는 시기에 강제동원 피해를 입은 연인원만 800만명에 이르며, 일본·만주·사할린·남태평양·중국 등 해외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만 103만명에 이를 정도이니 그 민족적 고통이란 것을 감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이것이 비단 과거만의 일일까? 해방 65년이 되도록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해외에 유출된 문화재 반환문제, 일본정부가 끊임없이 국제 분쟁화를 시도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문제, 역사 교과서 왜곡 등 한일 간 갈등은 오늘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오늘 한반도의 현실 또한 그 원죄가 일제 침략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할 때, 과연 100년 전의 역사쯤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난 100년에 주목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 일본정부의 태도를 볼 때 도대체 저 사람들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해방 65년 만에 후생연금 탈퇴수당금으로 자장면 반 그릇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99엔(한화 약 1300원)을 지급하는 일본정부의 태도가 그렇다.

문제는 과연 일본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만으로 우리들이 모두 면책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일본정부의 태도만을 탓하며 손 놓고 있었던 한국정부 역시 일본의 태도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99엔 사건을 보자. 일본 후생 노동성은 최근 해방 65년 동안의 화폐가치를 반영하지 않고, 단순히 65년 전 액면가 99엔을 지급한 것에 반발해 이의신청을 제기한 것에 대해, 또다시 ‘기각’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규정이 없다’는 궁색한 변명이었다.

한마디로 이는 무력한 대응이 자초한 결과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처음부터 외교적 협상을 포기했다. 그저 “성의있는 조치를 바란다”며 일본정부의 선처에 기대왔었다. 상대가 스스로 이렇게 무력하게 나오는데, 그 결과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이뿐이 아니다. 일본정부가 징용 피해자들에게 아직 지급하지 않는 미불임금을 해방 65년이 지난 현재까지 일본은행에 그대로 보관중이다. 최소 4조원대에 이른다. 과연 그 돈이 어떤 돈인가. 그런데 반환해 달라고 요구조차 않고 있다.

8·15를 앞두고 간 나오토 일본총리의 담화 발표가 점쳐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일본 총리의 입만 쳐다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관방장관마저 한일청구권협정의 미흡함을 고백하고 있는 마당인데 한국정부는 그 어떤 외교적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다. 제 나라 제 정부를 두고, 일본정부의 담화 발표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일제 피해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타들어갈 것인가. 이 여름이 더 갑갑하기만 하다.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