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북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일명 산티아고 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야곱의 무덤이 있다. 10세기 사도 야곱의 유해가 발견된 이후 유럽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성지(聖地)가 된 곳이다.

특히 여러 갈래의 순례길 가운데 프랑스의 소도시 생 장 피르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약 800km의 코스가 가장 유명하다. 걸어서 완주하기까지 약 30일 남짓 걸리는 만만치 않은 거리다. 1993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에는 매년 전 세계에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 ‘산티아고 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다. 브라질 출신의 인기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산티아고 길에서 얻은 깨달음을 소재로 쓴 에세이 ‘순례자’가 2006년 국내에 소개된 것이 계기가 됐다. 파울로 코엘료는 유명기업의 임원자리를 버리고 어느 날 훌쩍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로 떠났다. 중년의 나이에 인생을 되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순례자’ 이후 국내 출판계에는 여행가와 작가 등이 산티아고 길을 여행하며 기록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가운데 서명숙씨는 ‘산티아고’로 인해 인생이 180도 바뀐 케이스. 주간지와 인터넷 신문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출신의 서씨는 ‘삶의 피로’에 지쳐 떠난 800km의 산티아고 여정에서 고향 제주를 떠올렸다. 산티아고 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제주도에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그녀는 사단법인 ‘제주 올레’를 발족하고 사라진 길을 되살려냈다.

올레는 동네의 넓은 골목으로 연결되는 집 앞의 좁은 골목길을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남제주 일원의 약 320여 km에 해당되는 지역이 현재까지 13개 코스로 나뉘어 개발됐는데, 일단 걷기 시작하면 족히 5시간은 걸린다.

근래 ‘올레’만큼 근사하게 제주를 알린 홍보사절도 없다. 올해는 ‘입소문’ 으로만 지난달까지 약 8만여명이 이 곳을 다녀갔다. ‘올레’의 열풍은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지리산에도 지난 5월 ‘둘레’라는 옛길을 탄생시켰다. 5개 구간 70여 km가 개통된 둘레길에도 ‘도보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그 뿐인가. 광주에도 최근 동구 산수오거리에서 서석대에 이르는 11.2km의 ‘무등산 옛길’이 복원됐다. 개방 한달째 만에 1만2천여명이 다녀갈 정도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올레나 무등산 옛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건 ‘느리지만 여유 있는 삶’에 대한 현대인들의 갈증이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본격적인 휴가시즌이다. 삶의 속도에 떠밀려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번 여름엔 타박 타박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자. 올레길이나 무등산 옛길도 좋고 그냥 이름없는 시골길도 좋다. 걷는다는 것은 ‘가공되지 않은’, 원초적인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내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이다. 거기가 어디든 첫 걸음을 떼는 그곳이 바로 ‘산티아고 길’이 아닐까.



/문화생활부장·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