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사당역 사거리에 가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석조건물이 눈에 띈다. 서울 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이하 남서울 분관)이다. 1905년 중구 회현동에 지하 1층, 지상 2층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대한제국(1897∼1910)주재 벨기에 영사관이었다. 지난 1983년 도심재개발사업으로 지금의 남현동으로 옮겨진 후 문화재청 전문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복원됐다. 이후 20여 년간 우리은행의 사료관으로 쓰이다 지난 2004년 5월 기업의 문화예술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에 5년간 무상임대됐다. 서울시는 건물의 활용방안을 놓고 고민한 끝에 현대미술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공공미술관으로 개관했다.
남서울 분관의 최대 수혜자는 인근 주민들이었다. 잡초만 무성한 건물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주민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변신한 도심 속 미술관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술관 주변에 늘어서 있는 조각상들은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건 전시장 내부였다. 덩치 큰 소공동 시립미술관 본관과 달리 옛 벨기에 영사관을 리모델링한 아기자기한 전시장은 친근한 동네 사랑방을 연상케 했다. 여기에 현대미술 전시관과 체험학습장을 표방한 컨셉은 ‘작지만 색깔 있는 미술관’이란 경쟁력을 부여했다. 개관 3년 만에 남서울 분관은 주말이면 하루 300∼400명이 찾는 명소로 떠올랐다.
요즘 광주시 서구 농성동에 위치한 옛 전남지사 공관의 컨셉을 둘러싸고 물밑논쟁이 한창이다. 이 공관은 다목적 전시관으로 활용하기로 한 광주시의 방침에 따라 내년 4월 개관을 목표로 현재 리모델링중에 있다. 말이 다목적 전시관이지 광주 시립미술관이 위탁운영 할 예정이어서 지역 미술계는 시립미술관 농성동 분관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최근 광주시가 다목적 전시관이란 애매모호한 컨셉을 이용해 학계의 검증도 거치지 않은 모 역사화가의 작품을 비롯 공예품, 서화, 유물 등을 상설 전시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만약 이 같은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이 공관의 활용가치를 떨어뜨리는 근시안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특정 작가의 작품을 상설 전시할 경우 공립미술관이 개인미술관으로 변질될 소지가 있는 데다 종합선물세트 식의 전시관은 국립 광주박물관이나 시립미술관 본관의 아류(亞流)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모처럼 광주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온 옛 전남지사 공관이 또 하나의 문화명소가 되려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차별화된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 다목적 전시관이란 말대로 이것 저것 다 챙기려다 보면 하나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전남지사 공관이 시립미술관 농성동 분관이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