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임권택 감독은 메가폰 대신 피켓을 든 채 1인 시위에 나섰다. ‘천년학’의 배우들과 스텝들을 진두지휘해야할 그가 촬영장을 비운 것이다. ‘천년학’은 한때 메인투자자가 없어 크랭크 인이 늦어져 감독에게는 1분1초가 아까운, 공을 들여도 부족한 영화였다.
그런데도 노(老)감독이 촬영스케줄을 펑크내고 시위현장으로 달려간 것은 스크린 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때문이었다. 정부가 지난해 1월 한·미 FTA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스크린 쿼터를 종전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한 방침에 항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00번째 작품을 찍는 감독으로 살아남기까지 스크린 쿼터의 힘이 컸다. 만약 이 보호막이 없어지면 한국영화는 ‘메이드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먹혀 버리게 될 것”이라는 그의 목소리는 ‘일부 영화인들의 밥그릇 지키기’라는 주장에 밀려 묻혀 버렸다.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요즘 노감독이 우려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여기저기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한국 영화점유율이 20%대로 떨어진 데 이어, 최근 한·미 FTA타결로 스크린쿼터가 영원히 73일로 묶여 한국영화들이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천년학’이다. 기나긴 산고 끝에 세상에 나온 보람도 없이 대부분의 극장에서 사라지거나 교차상영(다른 영화와 번갈아 상영개봉)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개봉(12일) 이전 부터 한국영화 100만 명 관객신화를 쓴 ‘서편제’에 버금가는 수작이라는 평론가들의 찬사가 무색할 정도다.
지난 주말 광주의 한 변두리 극장에서 만난 ‘천년학’은 개봉 일주일 만에 이른 아침과 심야시간에만 상영되는, 부지런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귀한’(?)영화였다. 개봉 첫주 박스 오피스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바로 간판을 내리거나 스크린 수를 줄이는 냉엄한 시장의 논리에 밀린 것이다.
차가운 스크린 밖 세상과 달리 영화는 거장의 힘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학이 날아오르는 형상의 해안가 마을을 배경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주인공 동호와 송화의 인연은 수려한 영상과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주었다.
평생을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있을 수 없는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운명은 ‘사랑=게임’인 할리우드 인스턴트 멜로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한국적인 정서를 생생히 보여준다.
썰렁한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면서 우리의 삶과 한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담아낸 거장의 작품이 외면받는 현실이 아이러니 하다 못해 씁쓸하게 느껴졌다.
바닷물 길을 막아버린 선학동 포구의 방조제 때문에 학들이 찾지 않는 폐허로 변한 영화 속 한 장면은 머지않은 한국영화의 미래일지 모른다.
<문화생활부장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