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국 최초의 反유신, 함성지 사건(하)
**"독재자 눈에는 가시가 되리라"**
1973년 12월 10일 아침. 10월 18일 휴교령 이후 첫 등교를 한 전남대생들은 학교에 뿌려진 `함성''을 보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경찰과 교직원들은 이를 수거하느라 분주했다.
정보기관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터진 반유신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시점상의 미묘함도 작용했다. 5일 뒤인 15일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있었고, 통대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선거는 이달 23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유신독재의 외형적 체제가 갖춰지는 결정적 시기였다.
박석무는 함성이 뿌려진 당일 정득규 전남대 학생처장의 호출을 받았다. 박석무와 정득규는 무안 현경면 같은 마을출신. 정 처장의 방에는 전남대 정보부 파견자 김모가 함께 있었다.
정 처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난리가 났다. 이런 글을 누가 썼겠는가” 함성지 사건을 이강의 단독행동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박석무는 잠시 망설인 뒤 엉뚱한 이름을 둘러댔다.
박석무가 거론한 용의자(?)는 71년 교련반대 시위로 제적돼 군 복무중인 송정민(영문과 4년·현 전남대 신방과 교수), 고재득(법대 2년·현 서울 성동구청장), 김정길(상대 1년·현 광주·전남민중연대 상임의장), 김남주(박석무는 김남주가 고향 해남에 있는 것으로 알고있었다) 등 4명. 박석무는 “이강이 혼자서 함성지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선을 주기위해 무관한 사람들을 거론했다”고 술회했다.
김남주는 주목대상이 됐다. 경찰은 김남주의 사진을 보여주며 학생들을 상대로 탐문했다. (김남주는 함성 배포 이후 곧바로 서울로 갔다) 광주일고 2학년 때 “세상이 시끄러운데(한일회담) 무슨 학교가 데모도 안하는가”라며 자퇴했던 김남주는 대학 생활과도 거리가 멀었다. 경찰은 학생들로부터 `그 사람 조금 모자라다.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사람인데 무슨 데모를 하겠느냐''는 답만 들을 뿐이었다. 김남주는 결국 학점 미달로 졸업을 못했다.
시간은 별탈없이 흘러갔지만 경찰은 집요했다. 다음해 3월 중순 이강과 김남주의 행적에 주목하던 경찰에 한장의 편지가 걸려들었다.바로 이강이 서울 김남주에게 보낸 편지였다.
서울에 머물던 김남주는 73년 3월초 광주를 찾아 이강을 만났다. 둘은 함성에 이어 전국 대학에 뿌릴 `고발''지를 만들기로 했다. 고발 발간은 유신으로 인해 얼어붙은 전국 대학가에 반유신의 신호탄을 올리자는 뜻이었다. 또 전남대로 좁혀진 경찰의 수사망을 전국 단위로 키워 혼란시킬 목적도 컸다.
고발지의 요지. “4.19 넋으로 무장한 우리의 고발은 여러분의 고막을 울릴 것이요, 탐욕에 어두운 독재자의 눈에는 가시가 되리라. …제사(第死)공화국의 운명의 날은 멀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의 고혈을 빨아 모은 특권층, 단 한번의 민중봉기면 불타는 `대연각''보다 더 쉽게 한줌의 재로 사라진다”
고발은 이강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이강과 동생 황은 고발지 500매를 만든 뒤 이불보따리에 넣어 화물회사를 통해 김남주에게 우송했다. 배달되는 주소는 김남주의 광주일고 동창인 이개석(서울대 동양사학과 2년·현 경북대 교수)의 자취방. 이강은 이어 `전국대학 학생회 사무실에 고발지를 우송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일반우편으로 보냈다.
이 편지가 경찰에 포착됐다. 이어 화물회사에서 이불보따리가 수거됐다. 73년 3월 20일 오전. 이강은 학교 등교길에 붙잡혔다. 이강은 “담배불을 빌리자”며 접근한 4-5명의 사내에 붙들려 지프에 던저졌다. 끌려간 곳은 전남도경 대공분실(광주시 금남로 현 전남경찰청 주차장 자리) 지하실. 김남주는 서울에서, 박석무는 자신의 집 안방에서 붙잡혀왔다.
이강의 친구·후배·친척인 이황(당시 18세·재수생), 이정호(22세·전남대 물리학과 2년), 김정길, 김용래(21세·법대 2년), 이평의(28세·경제학과 4년), 윤영훈(21세·수학과 2년), 이개석 등이 2-3일 간격을 두고 잡혀왔다. 김남주의 영문과 동기 이경순(현 전남대 교수)과 강희순(당시 여중교사), 김남주의 동생 덕종(당시 18세)은 불고지죄로 연행됐다.
이강이 고발지를 준비하고 있을 때인 73년 3월 전남대에서는 또 다른 모종의 움직임이 있었다. 3월 말 또는 4월 초 반유신 시위를 하자는 것이었다. 삼민회(김용래 주도), 그린트리(이정호 주도), 교양독서회(김정길 주도) 등 교내 서클이 주축이 됐다.
김정길은 “3, 4월 중 반유신시위를 벌인다는 계획 아래 준비를 진행중이었다. 만약 함성지사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전국에서 최초의 반유신시위가 전남대에서 일어났을 것이다”고 말했다.
수사 당국은 함성·고발지 사건과 함께 전남대생들의 시위 준비를 교묘히 엮기 시작했다. 반국가단체 예비음모로 몰아가기 위해 조직의 `수괴''''로는 박석무가 정해졌다. 이강·김남주가 사실상 관련자의 전부였던 함성지사건이 반국가단체음모혐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강, 김남주, 박석무 등 9명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6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사건 당사자들은 지금도 “구타와 고문이 수사의 전부였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4월 19일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한달여동안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이강의 동생 이황은 “형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어 목소리로 겨우 분간할 정도였다”고 당시의 처참함을 증언했다.
김남주는 이때 당한 고문의 혹독함과 사람의 나약함을 이렇게 절규했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기꺼이 똥개가되어 당신의/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삽살개가 되라면/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손이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되어/'''' (74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에 발표)
홍남순, 이기홍, 윤철하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맡았다. 이기홍 변호사의 증언. “함성·고발지는 단순히 유신정권을 욕한 것이다. 이강과 김남주의 친구와 친척들이 가세했다지만 사실상 둘이 주도했다. 친구들은 다방이나 식당에서 몇번 만난 것 가지고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의 죄를 뒤집어썼다. 내란죄로 몰아야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엮을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데 그들이 무슨 힘으로 국가를 전복하겠는가.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강의 재판 회고. “고문경찰관 4명이 비공개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들은 `딸, 아들처럼 잘해주었는데 무슨 고문이냐''''며 고문 사실을 시종 부인했다. 여성인 강희순은 이들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혀 수없이 혼절했다. 법대학장인 조병갑 교수, 인문대 고재기 교수는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대에 서서 학생들을 옹호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73년 9월 25일 광주지법은 1심 선고를 내렸다. 박석무, 이강, 김남주를 제외한 구속자 6명이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27일 열린 항소심에서 나머지 구속자 3명이 풀려나왔다. 애초부터 관계가 없던 박석무는 유신체제의 법정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수괴가 무죄판결을 받고 종범은 유죄판결을 받은 기묘한 재판이었다. 대법원은 76년 6월 22일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오주승기자jsoh@kwangju.co.kr
**사건의미와 그 이후**
함성·고발지 사건은 최초의 반유신운동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러나 공인된 민주화운동사에서 73년 4월 부활절을 기해 일어난 기독교단의 반정부운동을 첫번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생략이 최근 바로 잡혀져가고 있다. 함성·고발지 사건의 복권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김정길은 “최근 박형규 목사와 만나 민주화운동사의 오류에 대해 논의했다. 박 목사도 함성지사건이 최초의 반유신운동이라는 데 동의하고 기록을 정정하자고 의견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함성지사건과 기독교단의 움직임에 이어, 73년 10월 서울 문리대에서, 12월 전남대에서 반유신시위가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반유신 움직임이 개헌청원 서명운동으로 이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와 함께 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했다. 함성지 사건의 주역들은 민청학련사건에도 다수 연루돼 고초를 치렀다.
5·18 직후인 81년 1월 박석무와 김남주, 김정길이 해우를 했다. 광주교도소 특별사동에서다. 함성지로 수감됐던 그 장소에서 7년여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이강은 직전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이강·김남주·김정길은 79년 터진 남민전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박석무는 5·18로 인해 교도소에 들어왔다. 박석무는 “오랫만의 만남으로 반가웠지만 우리의 운명은 여전했다. 기쁘고도 참으로 슬픈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
함성·고발지사건 주인공들은 이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경찰은 수시로 사찰과 연행, 가택연금을 했다. 제대로 된 직업도 찾지 못했다. 복학은 80년대 후반에야 이뤄졌다.
주모자인 이강은 87년 광주·전남 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으로 광주 6월항쟁을 주도했으며, 현재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으로 있다. 김정길은 광주·전남 민중연대 상임의장으로 지금껏 재야 외길을 걷고 있다. 이정호는 전남대병원 직원으로 있다. 이평의, 윤영훈, 김용래, 이황 등은 자영업을 하고 있다. 김남주의 동생 덕종은 농사를 지으며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다. 김남주는 88년 출소한 뒤 6년을 채 못넘기고 94년 2월 췌장암으로 죽었다.
/오주승기자jsoh@kwangju.co.kr
1973년 12월 10일 아침. 10월 18일 휴교령 이후 첫 등교를 한 전남대생들은 학교에 뿌려진 `함성''을 보고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경찰과 교직원들은 이를 수거하느라 분주했다.
정보기관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터진 반유신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시점상의 미묘함도 작용했다. 5일 뒤인 15일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있었고, 통대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선거는 이달 23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유신독재의 외형적 체제가 갖춰지는 결정적 시기였다.
박석무는 함성이 뿌려진 당일 정득규 전남대 학생처장의 호출을 받았다. 박석무와 정득규는 무안 현경면 같은 마을출신. 정 처장의 방에는 전남대 정보부 파견자 김모가 함께 있었다.
정 처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난리가 났다. 이런 글을 누가 썼겠는가” 함성지 사건을 이강의 단독행동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박석무는 잠시 망설인 뒤 엉뚱한 이름을 둘러댔다.
박석무가 거론한 용의자(?)는 71년 교련반대 시위로 제적돼 군 복무중인 송정민(영문과 4년·현 전남대 신방과 교수), 고재득(법대 2년·현 서울 성동구청장), 김정길(상대 1년·현 광주·전남민중연대 상임의장), 김남주(박석무는 김남주가 고향 해남에 있는 것으로 알고있었다) 등 4명. 박석무는 “이강이 혼자서 함성지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선을 주기위해 무관한 사람들을 거론했다”고 술회했다.
김남주는 주목대상이 됐다. 경찰은 김남주의 사진을 보여주며 학생들을 상대로 탐문했다. (김남주는 함성 배포 이후 곧바로 서울로 갔다) 광주일고 2학년 때 “세상이 시끄러운데(한일회담) 무슨 학교가 데모도 안하는가”라며 자퇴했던 김남주는 대학 생활과도 거리가 멀었다. 경찰은 학생들로부터 `그 사람 조금 모자라다.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사람인데 무슨 데모를 하겠느냐''는 답만 들을 뿐이었다. 김남주는 결국 학점 미달로 졸업을 못했다.
시간은 별탈없이 흘러갔지만 경찰은 집요했다. 다음해 3월 중순 이강과 김남주의 행적에 주목하던 경찰에 한장의 편지가 걸려들었다.바로 이강이 서울 김남주에게 보낸 편지였다.
서울에 머물던 김남주는 73년 3월초 광주를 찾아 이강을 만났다. 둘은 함성에 이어 전국 대학에 뿌릴 `고발''지를 만들기로 했다. 고발 발간은 유신으로 인해 얼어붙은 전국 대학가에 반유신의 신호탄을 올리자는 뜻이었다. 또 전남대로 좁혀진 경찰의 수사망을 전국 단위로 키워 혼란시킬 목적도 컸다.
고발지의 요지. “4.19 넋으로 무장한 우리의 고발은 여러분의 고막을 울릴 것이요, 탐욕에 어두운 독재자의 눈에는 가시가 되리라. …제사(第死)공화국의 운명의 날은 멀지 않았다. 가난한 민중의 고혈을 빨아 모은 특권층, 단 한번의 민중봉기면 불타는 `대연각''보다 더 쉽게 한줌의 재로 사라진다”
고발은 이강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이강과 동생 황은 고발지 500매를 만든 뒤 이불보따리에 넣어 화물회사를 통해 김남주에게 우송했다. 배달되는 주소는 김남주의 광주일고 동창인 이개석(서울대 동양사학과 2년·현 경북대 교수)의 자취방. 이강은 이어 `전국대학 학생회 사무실에 고발지를 우송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일반우편으로 보냈다.
이 편지가 경찰에 포착됐다. 이어 화물회사에서 이불보따리가 수거됐다. 73년 3월 20일 오전. 이강은 학교 등교길에 붙잡혔다. 이강은 “담배불을 빌리자”며 접근한 4-5명의 사내에 붙들려 지프에 던저졌다. 끌려간 곳은 전남도경 대공분실(광주시 금남로 현 전남경찰청 주차장 자리) 지하실. 김남주는 서울에서, 박석무는 자신의 집 안방에서 붙잡혀왔다.
이강의 친구·후배·친척인 이황(당시 18세·재수생), 이정호(22세·전남대 물리학과 2년), 김정길, 김용래(21세·법대 2년), 이평의(28세·경제학과 4년), 윤영훈(21세·수학과 2년), 이개석 등이 2-3일 간격을 두고 잡혀왔다. 김남주의 영문과 동기 이경순(현 전남대 교수)과 강희순(당시 여중교사), 김남주의 동생 덕종(당시 18세)은 불고지죄로 연행됐다.
이강이 고발지를 준비하고 있을 때인 73년 3월 전남대에서는 또 다른 모종의 움직임이 있었다. 3월 말 또는 4월 초 반유신 시위를 하자는 것이었다. 삼민회(김용래 주도), 그린트리(이정호 주도), 교양독서회(김정길 주도) 등 교내 서클이 주축이 됐다.
김정길은 “3, 4월 중 반유신시위를 벌인다는 계획 아래 준비를 진행중이었다. 만약 함성지사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전국에서 최초의 반유신시위가 전남대에서 일어났을 것이다”고 말했다.
수사 당국은 함성·고발지 사건과 함께 전남대생들의 시위 준비를 교묘히 엮기 시작했다. 반국가단체 예비음모로 몰아가기 위해 조직의 `수괴''''로는 박석무가 정해졌다. 이강·김남주가 사실상 관련자의 전부였던 함성지사건이 반국가단체음모혐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강, 김남주, 박석무 등 9명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6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사건 당사자들은 지금도 “구타와 고문이 수사의 전부였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4월 19일 검찰에 송치될 때까지 한달여동안 지옥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이강의 동생 이황은 “형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어 목소리로 겨우 분간할 정도였다”고 당시의 처참함을 증언했다.
김남주는 이때 당한 고문의 혹독함과 사람의 나약함을 이렇게 절규했다. `총구가 나의 머리 숲을 헤치는 순간/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기꺼이 똥개가되어 당신의/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삽살개가 되라면/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손이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되어/'''' (74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에 발표)
홍남순, 이기홍, 윤철하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맡았다. 이기홍 변호사의 증언. “함성·고발지는 단순히 유신정권을 욕한 것이다. 이강과 김남주의 친구와 친척들이 가세했다지만 사실상 둘이 주도했다. 친구들은 다방이나 식당에서 몇번 만난 것 가지고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의 죄를 뒤집어썼다. 내란죄로 몰아야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엮을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데 그들이 무슨 힘으로 국가를 전복하겠는가.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강의 재판 회고. “고문경찰관 4명이 비공개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들은 `딸, 아들처럼 잘해주었는데 무슨 고문이냐''''며 고문 사실을 시종 부인했다. 여성인 강희순은 이들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혀 수없이 혼절했다. 법대학장인 조병갑 교수, 인문대 고재기 교수는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대에 서서 학생들을 옹호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73년 9월 25일 광주지법은 1심 선고를 내렸다. 박석무, 이강, 김남주를 제외한 구속자 6명이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27일 열린 항소심에서 나머지 구속자 3명이 풀려나왔다. 애초부터 관계가 없던 박석무는 유신체제의 법정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수괴가 무죄판결을 받고 종범은 유죄판결을 받은 기묘한 재판이었다. 대법원은 76년 6월 22일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오주승기자jsoh@kwangju.co.kr
**사건의미와 그 이후**
함성·고발지 사건은 최초의 반유신운동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러나 공인된 민주화운동사에서 73년 4월 부활절을 기해 일어난 기독교단의 반정부운동을 첫번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생략이 최근 바로 잡혀져가고 있다. 함성·고발지 사건의 복권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김정길은 “최근 박형규 목사와 만나 민주화운동사의 오류에 대해 논의했다. 박 목사도 함성지사건이 최초의 반유신운동이라는 데 동의하고 기록을 정정하자고 의견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함성지사건과 기독교단의 움직임에 이어, 73년 10월 서울 문리대에서, 12월 전남대에서 반유신시위가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반유신 움직임이 개헌청원 서명운동으로 이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와 함께 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했다. 함성지 사건의 주역들은 민청학련사건에도 다수 연루돼 고초를 치렀다.
5·18 직후인 81년 1월 박석무와 김남주, 김정길이 해우를 했다. 광주교도소 특별사동에서다. 함성지로 수감됐던 그 장소에서 7년여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이강은 직전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이강·김남주·김정길은 79년 터진 남민전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박석무는 5·18로 인해 교도소에 들어왔다. 박석무는 “오랫만의 만남으로 반가웠지만 우리의 운명은 여전했다. 기쁘고도 참으로 슬픈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
함성·고발지사건 주인공들은 이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경찰은 수시로 사찰과 연행, 가택연금을 했다. 제대로 된 직업도 찾지 못했다. 복학은 80년대 후반에야 이뤄졌다.
주모자인 이강은 87년 광주·전남 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으로 광주 6월항쟁을 주도했으며, 현재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으로 있다. 김정길은 광주·전남 민중연대 상임의장으로 지금껏 재야 외길을 걷고 있다. 이정호는 전남대병원 직원으로 있다. 이평의, 윤영훈, 김용래, 이황 등은 자영업을 하고 있다. 김남주의 동생 덕종은 농사를 지으며 해남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다. 김남주는 88년 출소한 뒤 6년을 채 못넘기고 94년 2월 췌장암으로 죽었다.
/오주승기자jsoh@kwangju.co.kr